“민간인 유해발굴도 국가 차원에서 이뤄져야”

“유해 발굴 사업은 국가정체성 확립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입니다. 국가 정체성 확립을 위해서 국군 전사자 유해 발굴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과 함께 공권력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학살자에 대한 유해 발굴도 인권 차원에서 동일한 선상에서 이뤄져야 하는 일입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박선주(68·충북대 명예교수) 단장은 이념을 떠나 무엇이 중요한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국가의 정체성과 진정한 사회 통합이다.

박선주 충북대 명예 교수는 유해 발굴의 산 증인으로 꼽힌다. 2000년 국방부가 시작한 국군유해발굴사업에 참여하면서 지금의 유해 발굴 전문부대인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창설까지 이뤄냈다.

“국방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국가차원에서 전사자 유해 발굴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좀 도와줄 수 있겠냐고. 그래서 가봤더니 처음엔 정말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제가 전공한 형질인류학은 사람을 생물학적 측면에서 연구하는 분야입니다. 여기에 해부학 교수, 정치학 교수, 치의학 교수 등 전문가들을 다시 구성해 발굴현장에서 직접 보고 조사해서 유골의 성별과 연령을 가려냈습니다.”

이렇게 처음 유해 발굴을 시작한 곳은 6·25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328고지였다. 그곳엔 북한군 2만 명, 우리군 1만 명, 총 3만 명이 잠들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그곳에서 첫해 100여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다부동에서 발견된 2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있었는데 ‘최승갑’이라는 이름이 적힌 플라스틱 삼각자와 만년필·호루라기 등이 함께 발굴됐습니다. 전사자 기록을 뒤져보니 70대 중반의 아내가 생존해 있었고 결국 50년 만의 만남이 이뤄졌죠. ‘왜 이제 왔느냐’며 통곡하던 할머니의 모습이 잊히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바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2007년부터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사업을 지휘했다.
“민간인 희생자의 유해 발굴은 계층과 계층 간의 갈등을 풀어 주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도 희생자들의 유가족들은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고 일도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밑바닥 갈등을 빨리 해결해야 진정한 통합이 될 수 있죠.”

이 사업을 통해 청주 남일면 분터골에서는 340여구의 유해를 발굴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국가적 차원의 민간인 유해발굴사업은 중단된 상태이며 지금 이뤄지고 있는 발굴 사업은 유가족들과 민간단체, 자원봉사자들이 어렵게 꾸려나가고 있다.

“국군 유해 발굴사업과 민간인 유해 발굴 사업은 맞물려있는 두 개의 수레바퀴와 같습니다. 두 바퀴가 함께 굴러가야 제대로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아군이니 적군이니 이런 이념을 떠나서 묻혀있는 유해를 가족들 품으로 돌려주는 것이 가장 정당성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즘 박선주 교수의 가장 큰 걱정은 충북대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추모관’(임시유해안치소)의 존폐여부다.
“충북대에 있는 추모관은 희생자들을 임시로 안치한 곳이기 때문에 그 기간이 올해 12월이면 끝납니다. 기간이 연장될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옮겨질지는 확실치 않아서 안타까운 실정입니다.”

올해는 한국전쟁 65주년이 되는 해이다. 한민족이 북한과 남한으로 나뉘어 살아온 지 65년이 되는 것이다. 그 시간 속에서 아픔을 안고 살아온 우리 가족과 이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유해 발굴 사업은 그들에게는 가족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들의 유해 발굴 사업이 두 개의 수레바퀴처럼 오롯이 굴러가길 바란다.
 


김은지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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