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샘바람이 건네준 독감으로 2주일을 사경을 헤매다시피 앓았다. 어지럽고 소화도 안 되고 봄나물도 효험 없이 입맛이 똑 떨어졌다. 감기가 두려운 것은 기침이 중요한 순간에 무시로 나오고 목소리가 변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서 감기를 떼어내려 이불을 푹 덮고 따뜻한 방에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아픔을 달래본다. ‘고향 선산 할아버지 산소 곁에 수줍게 할미꽃이 피었겠지, 지구의 냄새를 맡으며 땅바닥에 낮게 자리하던 꽃다지도 가느다란 허리세워 노란꽃을 매달고 봄향기를 흘리고 있겠지.....온 천지에 찾아온 봄소식이 어떠한지 라디오를 틀어보니 마침 그리운 봄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음을 기울여 듣는다. 중학교 음악시간에 급우들과 불러보던 홍난파곡 봄처녀이다
 
봄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
하얀 구름 너울쓰고 진주 이슬 신으셨네
꽃다발 가슴에 안고 뉘를 찾아오시는고

가곡다운 소리를 내려 음악선생님을 따라 목청을 다듬던 그 시절엔 무심했던 가사 한소절 한소절이 새봄의 도래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연을 보고 봄처녀를 생각해낸 사람의 그 높은 순수에 숙연해진다.

새 풀옷으로 차려입고 하얀 너울에 진주 이슬을 신고 그것도 부족할세라 하양, 노랑, 분홍, 여린 꽃다발을 온 몸에 안고 우리를 찾아오는 봄처녀를 어떻게 생각해낸 것인가! 이 귀한 가사는 이은상의 시조에서 비롯되어 1930년대에 발표되었다하니 봄은 일제 침탈로 어두운 시절에도 곱게 어김없이 찾아온 모양이다.

또 하나의 선물! 언제나 그리운 윤용하 곡의 보리밭이 이어서 들려온다.

옛시절 사람들의 얼굴이 스치며 눈물이 그렁 고인다.

돌아보면 아무도 보이지 않고, 저녁놀 빈 하늘만 눈에 차오는 보리밭

보리밭을 듣고나니 아파도 부러울 게 없다. 보리밭은 어머니나 연인 못지않게 무한한 위안이 되어준 성자와 같은 존재이다. 거친 겨울바람과 얼음땅을 견디고 초록으로 초록으로 줄지어 돋아나는 보리싹은 어느 꽃보다 풍요롭게 추억을 살펴 봄을 태우고 왔다. 연인의 첫 만남과 같은 풋풋함과 설레임 그들에게서 눈길을 거둘 수 없다. 봄바람에 함께 흔들리는 초록 허리들 곁으로 달려가던 그 날들이 끝없는 지평선을 이루며 피어오른다.

이 아름다운 노래도 6.25 전쟁 중에 작곡 되었다하니 폐허 속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사람의 마음을 어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부산으로 피난 온 작사자는 종군기자로, 작곡가는 해군 음악대원으로 활동하던 당시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사이였다. 둘은 술자리에서 후세에 남길 가곡하나 만들자고 제안, 작가는 고향 황해도의 보리밭을 떠올리며 제목을 '옛 생각' 으로 시를 지어 작곡가에게 주었고 작곡가는 3일 만에 시에다 곡을 붙여서 제목을 '보리밭'으로 바꾸었다. 는 라디오해설이다.

그리운 봄 노래 두 곡으로 독감 바이러스 잠재우고 봄처녀를 맞으러 봄날의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보리밭을 찾아나서야겠다.

한소끔 불어오는 봄바람에 출렁이는 연초록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눈길을 옮기자면 나는 봄날의 천사를 만날 것이고 아직 살아있음의 축복을 가슴깊이 안게될 것이다.

아 그리운 나의 봄노래여
보리밭 연초록 파도를 타고 귀하게 오시는 봄처녀여
그대 보리밭은 어디서 오는가? 무엇을 꿈꾸며 하필 외로운 사람을 기다리는가?
보리밭은 생명이 있는 존재들의 희망의 물결이다. 아니 그리움, 염원의 몸부림이다


보은 산외초등학교 교장 박종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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