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댓 살 무렵이던가, 시골 우리 집 사랑방에서 한문을 배울 때였다.
동네 어르신들께서 다 모이신 사랑방은 늘 담배연기로 자욱했는데 그 담배연기 너머로 가끔 ‘한퇴지’니 ‘당송팔대가’니 하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무엇이 그토록 한퇴지를 ‘글 잘 하는 사람’ 으로 만들었을까 필자는 매우 궁금했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퇴지(退之)’는 한 유의 자로서 그는 과거시험에 여섯 차례나 낙방하는 동안 수많은 책을 읽어 문장이 탁월했던 인물이고, ‘당송팔대가’ 는 한 유, 유종원, 구양수, 왕안석, 증 공, 소 순, 소 식, 소 철 임을 알게 되었다.

이 중 한 유(韓 愈)는 누구인가? 글쓰기의 제한된 형식을 타파한 새로운 사조의 개척자였다. 한 유의 시대에는 4자나 6자구를 대구로 나열하되 많은 고사의 원용과 독음의 조화를 강조한 변려문의 시대였다. 변려문이란 지나친 형식주의를 추구하여 효율적인 내용 전달보다는 언어 유희적 경향이 짙어 부질없이 아름답기만 한 문장들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과감히 타파하고자한 한유는 과거시험 때마다 그 답안지를 변려문으로 작성하지 않고, ‘무형식의 형식’을 갖춘 글을 제출함으로써 번번이 낙방하였다.

그가 늘 주장한 것은 ‘새로움’ 이었다. ‘말은 어디까지나 나의 말이어야 한다’ 거나 ‘옛사람들의 해묵은 말들을 쓰지 않아야 한다’ 고 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글쓰기를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조를 ‘고문운동 (古文運動)’이라 한다. 여기서 고문이란 ‘옛 글’ 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새 글’을 의미하는 말로 변려문에 대응하는 말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모든 문사들의 보편적 화두는 어떤 문장이 좋은 문장인가 이다. 곧 문장은 예술적 수사미가 으뜸이므로 아름다움이 우선시되어야 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그 형식미 보다는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중요한가? 그것도 아니면 두 가지 요소를 다 갖춘 문장이 이상적인가? 물론 양자를 다 갖춘 문장이라야 좋은 문장이라는 것은 모두 인정할 것이다. 한 유는 형식은 타파했지만 그 무형식의 글 속에는 문체가 빛나야 글다운 글이라고 생각하여 수사미도 중요시하였다. 그러한 그의 집념은 초지일관 뚜렷하였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를 유학자라기보다는 문인 특히 산문작가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은 한유의 사위이자 문인인 이 한(李 漢)이 시문 716편을 모아 40권을 간행하였다. 그 서문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쓰러져가는 문장의 풍조를 바로잡아 사람들이 스스로 바른 글을 쓰도록 가르치셨다. 당시 사람들이 처음에는 놀라다가 다음에는 비웃고 배척하였으나 선생은 더욱 굳건하셨으니 마침내 휩쓸리듯 따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지금도 모든 문사들이 문장이나 자구를 다듬을 때 흔히 ‘퇴고(推敲)한다’ 라고 말하는데 이 말의 유래는 한 유와 시인 가 도(賈島) 때문이었다. 가 도가 과거를 보려고 서울 장안에 와 있을 때 나귀 위에서 좋은 시구가 떠올랐다.

새는 못가 숲속에 깃들어 자는데 〔鳥宿池邊樹〕
스님은 달빛 아래 문을 두드리네 〔僧敲月下門〕

가 도는 ‘문을 두드리네〔敲〕’ 라고 할까 ‘문을 미네〔推〕’라고 할까 골똘히 읊조리며 손으로는 두드리고 미는 시늉을 하다가 마침 당시 경조윤(京兆尹)으로 있던 한 유의 행차와 부딪쳤다. 호위병에 끌려서 한 유 앞에 나아간 가 도가 행차와 맞부딪친 사연을 ‘敲〔고〕’자와 ‘推〔퇴〕’자 때문임을 설명하자 한 유는 한참 생각하고 나서 ‘퇴’자 보다는 ‘고’자가 나음을 말하고 서로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한다. 한유는 이렇게 문장을 정확히 다듬는 일에도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전태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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