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눌재집』을 지은 박상은 관리 시인이었다. 관운이 별로 좋지 않았다. 중종반정과 기묘사화를 거친 불운한 시대는 그의 가족에게도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그의 형 정(禎)도 조사했다. 류종한(柳宗漢)의 딸과 혼인하여 3남 2녀를 얻었으나 유씨는 그가 33세 때 세상을 떠났고, 두 딸과 막내도 일찍이 죽었다. 이렇게 가정이 불운한 처지이면서도 눌재 만년의 일이지만 중종 21년(1525) 문과 중시에서 장원으로 뽑혔다. 그는 신진사류파의 태수 조광조가 사약을 받은 후 시체로 실려 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읊었다.

무등산 앞 기슭에서 손잡고 만났었는데(無等山前曾把手)
지금은 우차에 실려 총총히 고향으로 돌아가는구려(牛車草草故鄕歸)
훗날 저승에서 만나게 될 때에는(他年地下相逢處)
세상의 시비 뒤섞는 일은 말하지 말기로 합시다그려(莫說人間漫是非)

눌재는 중종이 반정한 그해 가을부터 사간원의 헌납(獻納)으로 1년 동안을 지낸 적이 있다. 그때에 30대 중반인지라 소장기예(少壯氣銳)하였다. 비행 비리는 기탄없이 탄핵하여 왕의 진노를 사기도 하였고 반정 원훈들의 미움을 받았다. 훈구파와 신진사류파의 대립이 극심할 때 그는 신진사류파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담양부사로 있을 때에는 훈구파를 질책하여 조정 대신들의 미움과 왕의 진노를 사 오림역에 정배되기도 하였다. 구 후 방면되어 다시 관계에 복귀하였다. 그러나, 훈구파의 모략으로 조광조를 비롯한 70여명에 달하는 신진사류파가 참화를 당한 사건인,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그는 당시 모상을 지키노라고 깊이 관여하지 않았다 하여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정치 파동이 극심했던 시대를 살았으나 그의 시문집에는 의아할 정도로 정치성이 희박하다. 당시 제가(諸家) 문집에는 우국지사임을 자임하고 자신의 주장과 행동을 충의로 정당화하려는 시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눌재의 시가 빛나는 것이다. 말라르메가 프랑스대혁명에 관여했으나 시는 오로지 상징주의에 입각하여 썼던 것처럼 눌재의 시가 그러하다.

눌재는 복잡 미묘한 정치 풍토에 사는 가운데 완전히 발을 떼지는 못하면서도 집착보다는 초탈을 희구하였고 시비보다는 달관을 갈망하였다. 정치는 버렸으나 인생은 버리지 않은 도연명의 시를 상기시킨다.

벼슬 버리고 자상으로 돌아가는 이 늙은이는(歸去紫桑今是翁)
북창에 높이 누워 가을 쑥대 사절했다(北窓高臥謝秋蓬)
굶주렸다고 단공이 보내 준 고기 받으려 들랴(飢腸肯受檀公肉)
빛나는 붉은 마음 해와 같도다.(耿耿丹心白日同)

여기서 쑥대라 함은 ‘같이 불려 떠돌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눌재는 시정에 묻혀 서민들과 잘 어울렸으나 마음만은 고결하게 살았다.

눌재는 중종 24년(1529) 나주목사를 내놓고 고향집으로 돌아가 신병을 치료하다가 이듬해 4월 11일,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묘는 광주 방하동 봉황산에 있는 전처 류씨의 묘 옆이고, 시는 문간, 이조관서를 추증,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되었다.

500여 년 전의 시사(詩史)를 왜 하는가
시인이라는 이름을 운전면허 자격증 따듯 하려는 시인 지망생들과 시를 좋아하는 모든 애독자, 특히 공직자 시인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전태익/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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