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지위 향상
우리나라가 일제에 수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 이후, 여성들도 구국운동에 참여하였으니, 그 대표적 비밀결사단체가 송죽회(松竹會)이다. 황애덕, 이효덕, 박현순 등 숭의학교를 중심으로 구성된 이들은 독립지사들의 생활비와 운동자금의 조달, 여성의 인권에 대한 자각과 활동, 민족정신의 고양과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당시, 이들은 여성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국민을 깨우치는 계몽자로, 소외된 이웃들에게 헌신하는 봉사자 등으로 활동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1893년 장로교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둘째항에서 ‘부녀자들을 전도하고 소녀들을 교육하는 일에 주력해야 할 것’을 다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녀교육은 부인들이 더 크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다. 그 구체적인 실천 항목으로 여자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시작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스크랜턴 부인은 1886년 이화학당을 건립, 교육함으로써 내로라하는 여성 인물들을 배출시켰다. 마침내 우리나라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향상된 것이다. 기녀와 무녀, 의녀(醫女) 외에는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이 없던 시대에, 이화학당의 이경숙과 연동 정신여학교의 신마리아는 한국 최초의 여교사가 되었다. 또한, 이화학당의 김점동은 미국에서 의학을 공부한 후 1,900년에 의사면허를 갖고 박에스더라는 이름으로 귀국한다. 그녀는 서재필에 이어 두 번째로 의사가 된 인물이다.

이처럼 한국의 여성운동사를 살펴보면,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힘입은 바 크다.

1920년대를 전후하여 동경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김원주, 김탄실, 윤심덕, 나혜석 등은 신여성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 뒤를 이어 유관순, 김활란, 모윤숙 등 조고계의 지도자들이 각 분야에서 활동하였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켜 최초의 여성대통령이 되었다.

신분 평등 운동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 1984년의 갑오개혁은 사회제도의 개혁이었다. 양반과 평민의 신분타파, 백정과 광대 등 천민신분 폐지, 공사노비제도의 철폐, 인신매매 금지 등이 주된 내용이었는데 이 개혁을 공포하게 된 배경에는 선교사 무어(Moore)와 박성춘의 공로가 크다.

박성춘은 지금의 안전행정부에 해당하는 내무아문에 탄원서를 냈는데 그 내용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대감의 비천한 종들인 우리는 500년 남짓 백정 일을 생활수단으로 살아왔습니다. 연례적인 대제때마다 조정의 요구에 순응해 왔지만 항상 우리는 무보수였고 가장 천대받는 일곱 천민 중의 하나로 취급 받아 왔습니다. ………… 우리보다 낮은 계층인 광대조차도 갓과 망건을 쓰는데 유독 우리만 허용되지 않고 있으니 그 한이 뼈에 사무칩니다. 이제 듣건대 대감께서는 옛 악습을 폐하고 새 법을 만드신다고 하옵는데 이것 때문에 당신의 비참한 종들이 희망을 갖고 주야로 열망합니다. 지금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었사오니 각하께서는 저희들이 갓과 망건을 쓸 수 있게 한 이 특별한 법이 전국 어디에서나 알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청하옵니다. 지방관아 아전의 학대를 금하도록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주 앞에 나오는 것을 환영하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는 양반들이 많았으나 신분 평등 운동을 전개하는 박성춘을 무어목사는 적극적으로 도왔다. 무어목사는 당시 한국 사회의 차별의식이 매우 뿌리 깊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백정은 거지보다 낮은 최하층계급이었고, 호적에도 올릴 수 없는 무적자들이며, 갓과 망건을 쓰거나 도포를 입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일반 백성도 누구나 백정을 무시하는 언행을 하는데 반하여 백정들은 존댓말을 써야했으며 그 신분은 자손들에게까지 세습되었다. 그러기에 평등사회의 실현은 한국사회의 근대화 작업 가운데 가장 우선시해야 했는데 그 시촉발과 실현은 기독교 선교활동의 영향이 매우 컸음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전태익/시인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