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월, 판문점에서는 휴전협상이 진행 중이지만, 쉽게 결판이 나질 않는다. 회담장을 나서던 방첩대 소속 강은표 중위는 치명적인 말실수 때문에 교착전이 한창인 최전선으로 발령을 받게 된다. 동부전선 ‘악어중대’에 북한군과의 내통자가 있는지 그리고 선임 중대장의 의심스런 죽음을 조사하는 것이 그가 맡은 특수임무이다.

강중위가 도착한 동부전선 케이맨 캠프는 ‘애록’ 고지를 사이에 두고 ‘악어중대’와 북한군이 긴박하게 대치하고 있는 곳으로, 휴전회담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거론되는 공간이다. 전쟁 영웅이 되어버린 ‘악어중대’의 분위기는 후방에서 회자되던 것과는 달리 이방인에게 그저 낯설고 의심스럽기만 하다. 춥다고 북한군 방한복을 껴입고 생활하는 병사들, 몰핀에 중독된 스무 살 중대장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이는 선임 중대장까지, 강중위는 파악이 쉽지 않은 이 현장이 당혹스럽고 혼란스럽다. 게다가 2년 전 의정부전투에서 실종되어 생사를 알 수 없었던 친구 수혁이가 전혀 다른 인격체가 되어 이곳 ‘악어중대’에 속해 있다는 사실 또한 신기할 따름이다.

강중위는 신임 중대장의 지휘아래 ‘악어중대’와 함께 고지 재탈환작전에 투입된다. 그는 치밀한 전투전략, 나무랄 데 없는 리더십과 전우애가 돋보이는 ‘악어중대’의 비상함에 서서히 동화되어 가지만, 비밀 참호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서 갈등에 휩싸인다.

<고지전>은 휴전을 앞 둔 한국전쟁의 막바지를 배경으로 최전방을 지키기 위해 희생된 군인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휴전협정을 시작 한 지 벌써 2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휴전 소식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애록’ 고지의 상황과는 무관한 듯 보인다. ‘악어중대’는 지도상의 영토 확보를 위해 악전고투하며, 살아남는 것이 곧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란 굳은 신념 하나로 버텨나간다. 수도 없이 주인이 뒤바뀌는 이 공간을 재탈환하기 위한 처절한 싸움은 누가 그들의 진정한 적인지 모호하게 만들었고, 행위의 확고한 이유도 모른 채 모두를 지쳐가게 했다. “인간 이수혁은 오래전에 죽었어.” 하던 수혁의 대사처럼 인간들은 이미 전멸했고, 전쟁에 적응하고 익숙해진 괴물들만이 존재한다.

이러한 공간에서는 아군이 아군을 몰살시켜버린 사건도, 무능력한 중대장의 피살이나, 어린 신병의 희생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생존 본능 앞에선 전우도 상관도 때로는 적으로 간주되기도 하고, 웃을 여유가 있는 순간엔 북한군이 오히려 서로의 처지를 공감할 수 있는 위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북한군과의 순수한 교류가 적과의 내통자로 오해받을 소지가 되겠지만, 그들 역시 전쟁을 위한 공동 희생자이자 그 순간을 함께 감내해야 하는 색깔 다른 군복을 입은 전우일 뿐이다.

비밀 참호에서의 에피소드와 조명탄 아래 펼쳐지는 중공군의 대공세를 포함한 몇 차례의 전투 씬, 그리고 북한군과의 조우에 이어지는 클라이막스 장면은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애잔하게 만든다. 종전 협정이 그 효력을 발휘할 때까지 남은 12시간동안 고지를 사수하라는 명령은 또 하나의 지옥을 만들고, 아군과 적군이 뒤엉킨 ‘애록’을 향한 무차별 폭격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적은 결국 ‘전쟁’이었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강중위의 시선을 통해 ‘애록’의 능선을 옮겨 다니며, 악어중대원 개개인을 살펴나간다. 시작은 적당한 거리를 둔 관찰자였지만, 어느새 그들의 대변인이 되었다가 결국엔 무모한 전쟁의 참화를 겪은 유일한 목격자로 남는다. 
 

이종희/프리랜서

 

저작권자 © 충북도정소식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