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暮途遠 ! 춘추 전국시대 오나라의 명 재상이었던 오자서가 그의 아버지와 형을 죽인 초나라 평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매질하면서 외친 일갈인데, 사마천은 사기에서 쇠채찍으로 300대를 때렸다고 기록하고 있고 이를 본 고향 친구 신포서가 이러한 반인륜적 행위를 나무라자 오자서는 "日暮途遠"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은 "해는 저물고 갈 길은 멀다"라고 해석할 수 있고, 할 일은 많은데 시간이 없다는 의미로 쓰여 지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시간적 개념 외에도 계기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을 수 있다.

즉 그 때까지 오자서 삶은 오로지 원수에 대한 복수의 일념으로만 가득하고 그가 가진 세상을 경륜할 만한 큰 재주는 증오에 가려져 시체를 매질하는 반인륜적 행위로나마 자신의 삶 깊게 드리워진 "복수의 화신"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큰 뜻을 펼치겠다는 소망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자서는 원래 초나라 사람으로 그 그릇과 재주가 강태공이나 관중에 비견될 정도의 큰 인물이었으나, 아버지와 형이 초평왕에게 죽임을 당하자 깊은 한을 품고 오나라로 피신하여 당대의 지략가인 손자병법의 손무와 함께 오나라를 남방의 강국으로 일으켜 세운다.

그러나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로부터 그의 아버지에 버금가는 仲父의 존칭을 들을 정도로 충정을 받치지만,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주인공인 부차가 원수 월나라의 계략에 휘말려 월나라의 경국지색 미인인 서시에 빠져 살자 이를 충간하다 결국은 역린지화(逆鱗之禍)를 당하게 된다.

부차에게서 자결의 검(촉루지검)을 받은 오자서의 마지막을 사마천은 사기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 죽은 후 눈알을 빼어 월나라 쪽 동문에 걸어라! 월의 구천에 의해 부차가 망하는 모습을 똑똑히 볼 것이다. 또한 내 무덤에 가래나무를 심어라! 부차의 관을 짜는데 쓸 수 있도록...“ 이렇게 오자서는 한 서린 유언과 함께 평생의 충정과 업적을 증오와 원한으로 남기고 만다.

그 후 오나라는 오자서의 예언대로 월왕 구천에 의해 멸망하고 부차는 죽음을 맞이하면서 “내가 죽거든 흰 천으로 두 눈을 가려라! 저승에서 오자서를 뵐 낯이 없다.”고 했다지만 한 쪼가리 작은 헝겊이 부차의 미욱함을 역사 속에서 가리지는 못했다.
논어에 “君君臣臣 父父子子”(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어버이는 어버이다워야 하며 자식은 자식다워야 함)라는 말이 있다. 평상시 또는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다움”이 아니라 위기의 순간에서 까지도 “다움”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도 담겨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르고 자신도 결국은 죽임을 당한 오자서의 日暮途遠이 주는 회한을 찬찬히 생각해 보게 된다. 부차는 君으로서 평상시 “다움”을 잃었고, 특히 오자서는 臣으로서 “다움”이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에 스스로 “다움”을 던져 버렸다. 갈대와 같이 약한 인간의 한계일까.

우리네 사람 사는 세상! 금석같은 충정, 우정, 사랑도 세월을 따라, 이리저리 부는 바람을 따라 변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자연의 섭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늘 함께 하는 상사와 부하, 동료, 친구, 차마 연인지간이라 해도 한순간에 마음이 멀어지고 금이 생겼을 때 미워하고 원망하기에 앞서 그동안 함께 살면서 가슴속에 쌓아둔 믿음과 정을 돌이켜 그 당시 상대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처지를 헤아려 주고 이해해주는 배려는 성인 군자 만이 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는 기대고 또 다른 하나는 받쳐주면서 서로를 살게 하는 사람 인(人) 한글자의 참 의미를 찬찬히 생각한다면 언젠가는 돌아설 수밖에 없는 삶의 이치, 자연의 이치 앞에 선 자신의 뒷모습을 편안하게 지켜갈 수 있지 않을까.

김용국/공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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