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마다 가풍이 다르겠지만 우리는 매년 명절이 되면 추도예배를 드리고 성묘를 했다. 장모님 산소는 천안공원묘원에 있고 장인어른은 진천, 아버지는 보은 선산에 계시니 서둘러도 하루해가 짧은 실정이다. 설 전날부터 연휴이니 올해는 서울에서 아들이 오는 대로 성묘를 하고 싶었다. 설날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고 싶어서다. 아내에게 넌지시 운을 떼었더니 뜻밖에 순순히 응한다. 실은 아내가 성묘는 설날 해야지 미리 성묘를 하느냐며 의지가 완강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아내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 녀석은 왜 아직도 오지 않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푸념을 한다. 이따금 창문을 열고 멀리 시선을 응시하며 머리를 갸우뚱한다. 오후가 되어서도 아들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한 모습이 역력하다. 밤새좌불안석을 하더니 드디어 새벽에 귀가한 아들을 얼싸안고 ‘차가 밀렸구나’, ‘오느라고 고생했지’ 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던 아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활짝 핀 파안대소의 모습이 마음에 와 닿는다.

세시 풍속집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원일(元日), 원단(元旦), 세수(歲首) 등으로 불렀던 새해 첫날, 제를 올리는 것을 차례(茶禮)라 하고 어른 찾아뵙는 것을 세배(歲拜)라 했다. 설날은 근신하고 조심하는 날이라고 해서 한문으로는 신일(愼日)이라고 쓰기도 한다. 또한 설날에 올리는 음식을 세찬(歲饌)이라 했고 이에 곁들여 마시는 술을 세주(歲酒)라 했다. 속담에 “설은 질어야 하고, 보름은 말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설날 의례를 마친 다음 친척과 마을사람들끼리 모여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겼는데 이 놀이는 설날뿐 아니라 정월 대보름날까지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민속놀이는 이 시기에 가장 많이 집중되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의 설날 풍속도 크게 다르지 않다. ‘새롭다’는 의미가 더 강해지면서 ‘설날’이 ‘새해의 첫날’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 잡았다. 그러면 ‘설’ 어원은 어떻게 될까. 정설은 없지만, ‘낯설다’는 의미에서 ‘새로움’, ‘덜 익다’를 뜻하는 ‘설다’에서 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몇 살’이라고 할 때의 ‘살’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설’이 들어간 단어들은 모두 어원상 동의어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공통 의미가 ‘처음, 시작’이라는 점이다. ‘설’은 한 해의 첫날이다. 또 설날에 나이 한 살을 더 먹으니, 나이를 세는 단위인 ‘살’이 ‘설’로 인식된 뜻도 포함된다. 육당 최남선은 ‘설’은 나이 한 살을 더 먹게 돼 ‘섧다’는 뜻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유년시절 설빔으로 단장을 하고 차례를 지낸 후 부모님께 세배를 드렸다. 한번은 큰아버지께 먼저 세배를 드린 적이 있다. 어린마음에 아버지보다 큰아버지께서 연세가 많으시니 먼저 세배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부모에게 먼저 세배를 하는 것이 순서라고 일러 주셨다. 오늘따라 사람도리를 엄하게 하시면서 가르침을 주셨던 아버지 생각이 간절하다.

우리 마을에는 20여 호가 살고 있었는데 설날이면 제일 윗집부터 차례로 어른들을 찾아뵙고 세배를 드렸다. 그 시절은 너나할 것 없이 가난했지만 설날만은 집집마다 풍성한 음식에 세뱃돈도 받고 칭찬도 들었으니 유년시절의 설날 풍속이 더없이 그리워진다.

올해도 예년처럼 설날에 추도예배를 드리고 성묘를 다녀왔다. 온몸은 녹초가 되었지만 집에 오자마자 아들은 테니스 치러가자고 재촉한다. 그렇게 하면 내가 좋아하리라는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하다.

테니스장은 아파트와 인접해서 발아래 있다.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를 치니 힘은 붙여도 재미가 쏠쏠하다. 사뭇 시소게임이다. 쉽사리 승패가 나지 않는다. 아들은 몸이 빠르기도 하지만 스매싱이 좋다. 힘을 다하여 공을 되받아치면서 계속 공이 넘어오니 지칠 수밖에 없다. 초장에 결판을 내야한다고 결정타를 날리다보니 실수가 많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실점을 더하게 되니 체면이 서지 않는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뿌듯하다. 11층 아파트에서 아내가 창문을 열고 경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아들이 잘 하면 환호를 하는 것이 마음속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내심은 반쪽을 응원하리라고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난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에 바쁜 중에도 매일아침 테니스를 하고 출근한다는 아들이 대견하다.
테니스를 할 때는 잡념이 사라진다. 운동 외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테니스에만 전념하게 된다. 서브, 스토로크, 스매싱, 발리에 정신을 집중하고 몰입한다. 서브에이스, 드롭발리, 포치, 강스매싱, 멋진 발리라도 성공 시키면 그 순간이 환상이다. 주위에서 ‘나이스 샷’이라도 외쳐주면 그건 더없는 기쁨이다. 내가 이 세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라도 된 듯 황홀하다. 아마도 그 맛에 테니스를 하는가 보다. 열심히 뛰고 땀 흘리는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과 근심은 사라지고 행복감에 빠진다.
평소 동호인들과 짝을 이루어 게임을 하다보면 상대에 따라 경기가 달라진다. 호흡이 잘 맞는 짝을 만나면 게임이 잘 풀리고 상대에 따라 유연한 경기가 펼쳐진다. 그러나 호흡이 맞지 않으면 힘이 들고 게임이 풀리지 않는다. 서로가 파이팅을 연호하면서 정감을 통하면 금 새 친근한 사이가 된다. 게다가 호흡이 맞아 게임이 우리 편 의도대로 되어 준다면 더없이 즐거운 일이다. 스포츠란 사람 마음을 단순하게 하고 한곳으로 집중하게 한다. 그중에서도 테니스는 마음과 마음을 통하게 한다. 복식조에서 파트너를 이루어 한사람은 찬스를 만들어 주고 또 한사람은 스매싱이나 발리로 결정타를 날린다. 파트너가 실수 할 경우가 있지만 ‘파이팅’으로 용기를 주거나 관용으로 따뜻함을 전한다. 대부분 스포츠가 그렇지만 테니스는 조직을 하나 되게 하는 따듯하고 끈끈한 힘을 갖고 있다. 어디 여행이라도 떠나면 라켓 가방, 옷과 운동화 챙기는 것은 필수다. 목적지가 어느 곳이던 코트를 찾아가면 누구나 반겨준다.

아들과 테니스공을 따라 달리며 승부를 주고받고 땀을 식히면서 친구처럼 웃어본다.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다. 연휴 때마다 여행이나 영화 보기 등 여러 가지 계획이 있지만 가족끼리 스포츠를 즐긴다면 더없이 복된 일이다. ‘복 많이 받으라’고 건네주는 새해덕담만큼이나 함께 뛰고 달리면서 일체감을 느껴보라. 생활에 깃들었던 가족 간의 문제도, 주위 지인과의 관계도 스르르 풀릴 것이다.

새해에는 아내와 딸도 함께 테니스를 하며 환호하는 순간의 꿈을 가져본다.

설은 한 해의 첫날이다. 늘 처음처럼 자녀들과 힘차게 그라운드를 달리는 부모가 되고 싶다.

/ 정관영 공학박사/우석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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