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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헌 선생을 기리며
조헌 선생을 기리며
  • 함께하는 충북
  • 승인 2019.10.16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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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 디지털청주문화대전-조헌 전장기적비
사진출처 : 디지털청주문화대전-조헌 전장기적비

 

청주 중앙공원을 가리켜 비림(碑林)공원이라고 부른다. 역사적이고 의미가 있는 비석들이 많아 비석의 숲이라 부르는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영규대사 전장 기적비’, ‘의병장 한공봉 수송공비’까지 이외에도 다양한 비석이 현 시대에 남아 우리에게 역사를 느끼게 해준다.

여러 비석 중에서도 임진왜란의 반격을 이끈 ‘조헌 선생의 전장기적비’가 눈에 띈다. 임진왜란 당시 1,700여명의 의병, 승병과 함께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옥쇄하신 중봉 조헌 선생의 살신 호국정신을 기린 비석이다. 중봉은 조헌선생이 말년에 지은 호라고 하는데 조헌 선생은 어떤 인물일까? 우선 청주성 탈환 전투는 일반적인 전투나 승리가 아니었다. 임진왜란 발발 이후 첫 승리라는 점에서 기념할만하다. 이러한 조헌선생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북 옥천군에는 ‘후율당’이 있다. 충북도 기념물 제13호로 지정된 후율당은 의병장인 조헌이 옥천에 낙향하여 살 때 지은 건물로 스승인 이이의 호인 율곡에서 율자를 따서 후율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바로 이곳에서 관직에서 물러나 후학을 가르치며 보냈고 이후 전쟁이 일어나자 지체 없이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는 공을 세웠다. 그 후 선생은 안타깝게도 금산싸움에서 순국하였다고 전해진다.

조헌을 흔히들 무인, 의병장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원래는 이이와 성혼의 문인으로 서인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관료이자 정치가였다. 명나라를 다녀온 후 여러 개혁을 주장했으며 공물제도와 서얼 차별의 폐지 등을 제시한 개혁가였다. 그는 명나라의 경험을 담아 ‘조천일기’라는 기록을 남겼고 명나라의 문물제도 중 본받을만한 것을 여러 차례 상소로 올렸다. 특히 주목 할만한 것은 그가 신분제도의 개혁을 적극 주장했는데 그의 진보적인 개혁성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개혁적인 성향, 현실비판적인 시각으로 인해 관료생활은 순탄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선조는 조헌을 가리켜 간귀라고 표현했으며 그가 상소를 올릴 때마다 불편해했다.

조헌선생을 더 알고 싶다면 옥천군 안남면 도농1리에 있는 조헌선생의 신도비와 묘소를 찾아가보자. 뿐만 아니라 올해는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중봉중렬제’가 열리는 데 이 또한 좋은 기회다. 중봉중렬제는 조헌선생의 호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행사로 추모제향, 중봉가 내림음식 축제 및 봉축회, 세미나, 가장행렬, 불꽃놀이 등이 예정되어 있다.

 

/ 이기수 충북 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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