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은 산이라도 정상에서 내려오면 서서히 잊어버리는데 두타산은 나의 뇌리와 가슴에 지금껏 자리하고 있다. 산을 찾을 때는 과연 정상의 형세는 어떠할지 사람들은 무작정 옆도 안보고 오르고 또 오른다. 대부분의 정상은 조금은 오만하고 위험한 형세로 위용을 과시하는데 두타산은 달랐다. 꽤 넓은 바위가 제단처럼 자리 잡고 그것도 계단식으로 3단까지 있어 편안하다. 작은 정이품송처럼 아담한 소나무도 한그루 서있어 정상의 단아함을 잃지않고 있다.

낮지도 그리 높지도 않은 598미터라는 네모난 표지석이 우리 내외의 입장을 허락하는 듯 의연하다. 등산 초반부터 사람들이 거의 안보여 정상에도 아무도 없으려니 했는데 타도에서 온 몇 사람이 도시락을 펴놓고 정상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그 옆에서 우리 내외도 김밥과 갓김치로 맛있게 점심을 나누었다. 두타! 부처가 누워있는 모습의 섬 같은 산이라고 불린다. 실은 증평 쪽으로 나들이 갈 때마다 멀리 지켜보면서도 빨리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크게 내키지는 않는 산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등산을 결심하고 두타산에 깃든 ‘영수사’로 가는 입구부터 반해버렸다. 작은 계곡을 따라 진입로는 좁아 차들이 빨리 달릴 수 없어 좋고 일주문이 거인처럼 시원스레 서서 환영한다. 위로 오르면서 이곳저곳 살펴볼수록 나무 한그루, 바위 등이 평범을 넘어 기대 그 이상의 운치를 지녔고, 어느덧 정상 부근의 소나무 군락을 만났을 때 감동이 펼쳐진다. 굵은 소나무가 이리 휘고 저리 굽히고 마치 일부러 키워낸 분재처럼 기기묘묘한 형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점심 흔적을 말끔히 없애고 기념 촬영 후 정상을 또 한 번 눈에 넣는다. 내려오면서 삼국시대에 쌓았다는 석성의 흔적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다녀간 사람들이 피라미드 형세로 쌓아올린 작은 탑들이 초록 이끼를 얹고 돌의 초원을 이루고 있다.

정상을 먼저보고 하산 길에 들르기로 한 옹달샘과 전망대가 계속 설레임을 부추기고 있다. 먼저 우측으로 옹달샘 표지를 따라 내려가는데 남편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깊은 산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

어서 옹달샘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며 나도 따라 부른다. 한참을 내려가도 샘이 보이지 않는데 앞서 찾아보던 남편이 ‘여기다’하며 소리친다. 달리다 싶이 가보니 큰 바위틈 아래로 물이 졸졸 흘러나와 작은 바위 사이에 물이 고여 있는 것이다.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파란 바가지가 있어 한 모금 떠서 마시니 두타산을 찾아온 보람과 상서로움을 만끽하게 된다.

다시 비탈을 올라와 전망대를 향하여 걷는다. 전망대는 정상에서 내려오면서 좌측에 있었다. 이정목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니 목재 계단과 가는 목재로 안전하게 울타리를 친 전망대가 보인다. 또 한 번 벅찬 가슴으로 전망대에 서니, 정상에서 보이지 않던 만뢰산, 백곡 저수지가 아득히 보이고 진천읍, 이월면 등 인간이 나누어놓은 세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이번 가을을 맞으면서 두타산 등산을 정한 것은 다름 아닌 아버지 때문이다. 두타산은 아버지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연관되어 있다. 진천에서 국민학교를 다니셨고 지금은 증평에서 가까운 청주시 북이면 선산에 누워 계시기 때문에 두타산을 바라보면 늘 아버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올해로 아버지 떠나신지 꼭 10주기를 맞아 두타산을 처음 찾은 것은 우연의 일치면서도 기념비적인 일이다. 두타산은 아버지의 산에서 오늘 비로소 나의 산으로 탄생한 것이다. 멀리 아버지 어린 시절의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금빛 물결이 출렁이던 그 옛날이 전망대까지 이어 올라오는 듯 아버지와 다정했던 순간들이 가슴에 또 피어난다. 여고입학을 위해 시험을 보러갈 제 버스 멀미에 지친 나를 아버지가 등 두드리고 치워주신 일, 아버지가 학교 관사 외에 처음 마련한 집 이층화단에 아치를 만들고 나팔꽃을 심고 장미덩굴을 함께 올리던 일, 제천으로 아버지와 나의 외동딸 삼대가 기차를 타고 여행 가던 일 등 어쩌면 의기소침한 외아들인 오라버니 대신 나를 작은 아들삼아 많이 의지하신 것 같다.

남편이 내 손을 잡고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채근한다. 아버지를 기억하며 매년 한번 씩 두타산에 오르자고 제안을 한다. 그 옛날 남편을 만나 첫선을 보고 부모님께 소개 인사를 드렸을 때 제일먼저 아버지가 합격점을 내리신 것이다. 그 후 제부가 된 여러 명의 사위를 보셨지만 아버지는 남편을 가장믿고 하나뿐인 오라버니를 부탁하며 총애하셨던 것이다.

내려가며 다시 보아도 나무들과 바위의 형상이 예사롭지 않고 비탈도 알맞다. 일 킬로 정도 내려오니 ‘영수사’라는 이정목이 드디어 나타난다. 가을햇볕이 부드러운 화살로 나뭇잎을 물들이고 연인처럼 다녀가는 바람이 나뭇잎을 건드려 말없이 이어지는 자연의 순환이 무엇보다도 신비롭다.

경사가 완만해지더니 저 아래 영수사 지붕이 푸릇푸릇 보인다. 영수사는 석탄일에는 보물 1551호인 괘불탱화가 내걸려 불심을 북돋우는 곳이다. 아침 등반 시작에 산의 깊은 고요를 열며 들려오던 목탁소리는 잠잠하고 대웅전 뒤 고욤나무 아래 스님이 그림처럼 서 있다.

나는 철이 없었다. 아버지가 언제 두타산을 올라가보신 적이 있는지 생전에 한 번도 질문하지 않은 것이 이제 사 깊은 회한으로 남는 것이다. 오직 바라는 것은 아버지도 젊은 날에 이 두타산 어느 산길에 발걸음을 남기셨는지 아니 흔적이라도 남아있기를 소원하는 것이다. 넓고 두툼한 목판에 ‘두타산 영수사’라는 이름을 단 일주문이 우뚝 서 아버지 대신 손을 흔든다.

‘와 줘서 고맙노라고 돌 하나 나무하나 새 한 마리 지나는 바람 한줄기마저도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었노라고’

이제 사 아버지의 산을 찾은 나도 늙어가고 있는 것일까?

산은 늙어가면서도 젊음을 잃지 않는다. 늘 새 생명을 위해 비바람 견뎌내고 새들의 둥지를 위해 팔을 내 놓는다.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으니 산에 들 때마다 무심한 사람들에게 끌림을 선물한다. 늘 그런 산에 오를 수만 있다면

더 없는 축복이다. 누구에게나 산, 산이 있다.

 

/ 박종순 전 복대초등학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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