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풀 줄기에 씨가 잔뜩 들었다. 엉성하기는 해도 제법 늘차다. 달개비 역시 창백하지만 저만치 익느라 힘들었겠다. 다랑논의 벼이삭에서는 보석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삭 하나에 봄여름 가을이 전부 들었다. 바람과 볕과 태풍까지 합세해서 일군 결실이다. 옷깃이 절로 여미어진다. 콩꼬투리 하나 거저 된 게 없다.

그렇더라도 뽐내는 기색은 아니다. 옹골찬 것은 옹골찬 대로 숙이고 쭉정이는 쭉정이대로 더 영글기 위한 자세를 다진다. 자랄 때는 업신여기고 부러워하는 시샘도 있었으나 가을 들녘에서는 힘들었다고 서로 토닥이는 폼이다. 알차게 익었든 덜 익었든 수위가 똑같은 물처럼 수평을 유지한다. 숙이지 않은 채 뻣뻣이 굴었으면 위태로웠다. 특별히 잘 영글었어도 드러내지 않으려는 묵계가 돋보인다. 꽉 차 있어도 허룩한 느낌은 곧 속속들이 익는 가운데 쳐들기 쉬운 자만이 방류된 것일까.

황금물결이 암만 넘쳐도 그럴지언정 숙일 줄 아는 마음이 훨씬 아름다운 초가을 화폭이다. 송곳 하나 들어가기 힘들게 포화상태건만 넘지는 않는다. 위험수위라 해도 탈은 없다. 낱낱 익어가면서도 자칫 뽐내게 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자중하는 겸양이 옹골차다. 조신한 마음 없이 방자하게 나올 경우 끝내는 넘쳐서 황금들판이고 뭐고 죄다 떠내려갔다. 아찔한 순간이다.

몇 해 전 청미천 개울이 만수가 된 적이 있다. 모두들 대피를 해야 된다고 법석이었으나 자정을 고비로 물이 빠지기 시작했다. 태풍이 와도 다른 지방보다 순하게 지나가는데 이따금 그렇게 소동이 벌어진다. 강물의 범람으로 농사를 망칠 때는 이듬해 만회할 수 있으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여파는 평생을 간다. 우리에게도 수위 조절은 필요했다. 위험수위에도 넘지 않는 묘수는 익을수록 숙여야 된다는 처방에서 나왔다. 익힘의 실체는 뭘까.

가을에는 모든 게 한 치수 내려간다. 처서가 지나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차 있던 녹음이 헐거워지고 그게 결실의 시작이다. 벼이삭이 느슨해지고 깻잎이 투명해지면서 익힘을 준비한다. 그에 비해 하늘은 북 판처럼 팽팽하다. 쳇바퀴에 포플린 천을 박은 것 같은 틀이 올 하나하나를 셀 수 있을 정도다. 여름에는 풀과 곡식이 등등한 반면 먹구름 낀 하늘은 처지곤 했는데 지금은 하늘이 짱짱한 대신 곡식과 풀은 헐거워졌다. 애써 드티고 앉지 않아도 한 사람은 능히 들어갈 만치 편안해 보인다.

붉게 물든 단풍과 고추밭은 빛깔 고운 천 그대로다. 조목조목 꽉 차 있는데도 부담이 없다. 옷으로 치면 꽉 끼는데도 불편하지는 않다. 가득 찬 중에도 빡빡하거나 긴장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결삭은 들깨와 벼이삭을 담뿍 떠낸 뒤 윤곽을 따라 감치면 모듬모듬 수라도 놓을 것 같다. 가을에만 볼 수 있는 특별한 풍경이다.

콩, 팥꼬투리가 튕겨져 나가도 기척은 없다. 깻송이가 쏟아질 때는 가야금 줄 뚱기는 소리가 날 법하건만 시치미를 떼고 있다. 아람이 번 밤송이도 수북한데 떨어지는 순간 포착은 어렵다. 벌레조차도 상당히 조심스럽다. 떼로 모여 날개를 비벼대고 노래를 해도 귀를 기울여야만 들을 수 있다. 하늘이 높아지는 탓인가 구름까지도 조신하다. 먹구름은 변덕을 부리고 수선을 떨지만 새털구름과 조개구름은 새침데기다. 여름에는 태풍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나 가을에도 태풍이 있다고 보면 얄미울 만치 차분하다.

가을에는 색깔에도 변화가 온다. 여름내 날을 세운 벼이삭과 시퍼런 들깻잎도 결이 삭는 동시에 창호지마냥 투명해진다. 짙푸른 밤송이는 아람이 벌면서 갈색으로 변하고 사과니 배도 얼금얼금 조직이 쫀쫀해지고 깔이 산뜻하다. 은행잎만 해도 녹음에 뒤덮이던 여름과는 달리 색감이 얇아지면서 금붙이마냥 노랗다. 녹음 자체가 흥건한 물기였으며 이듬으로 잦힐 동안 습기가 증발되면서 선명한 빛깔로 채색된다.

익힘은 그런 걸까. 지금과는 달리 보이지 않는 속까지 익히기 위해 초록을 지우고 여백을 남겨두었다. 빈 자리 없이 익는데도 넘지는 않으면서 순서를 지킨다. 결이 삭는 동안 색깔에 변화가 오고 치수가 허룩해져도 티를 내지 않는다. 익힘이란 시끄럽거나 요란스럽지 않다는 묵계를 보는 듯하다. 치기를 부리고 싶어 한 적이 있다면 분명 덜 익었을 때다.

익힘은 또 순서를 고집한다. 맨 처음 익기 시작하는 것은 벼 이삭이다. 벼 안 팬 8월 없다고 복더위와 함께 팬 이삭이 추석 무렵에는 일제히 영근다. 낱알이 달그락거릴 정도로 마르면 토란과 땅콩 고구마 등의 땅 속 줄기에도 알이 배기 시작한다. 메뚜기가 제 세상처럼 활보할 때는 콩이니 팥 동부 꼬투리가 틀어진다. 햇살이 따가워지고 배배 틀어지면 곳곳에 알갱이가 흩어지는 특유의 모습이 정겹다.

뒤따라 향연을 펼치는 것은 단풍이다. 연지를 찍은 듯 꼭대기부터 듬성듬성 물들기 시작하면 단풍의 군단이 절반은 상륙한 후였다. 그럴 때는 이상하게 옷깃이 말려들었다. 곧 이어 자잘한 단풍과 굴참나무를 필두로 샛노랗게 물드는 낙엽송이 등장한다. 새싹이 돋을 때도 방해가 될까 봐 작은 것부터 촉을 틔우는 걸 봤는데 단풍물 드는 지금까지도 차례를 고수한다.

가장 늦게까지 익는 것은 박 종류다. 서리 거둠을 한다고 거둬들인 애호박을 빼고는 몇 번 더 서리를 맞게 두지만 조롱박은 훨씬 늦다. 초여름 흙을 뚫고 나온 싹이 지붕을 타고 오르다 보면 가을도 깊어진다. 쌀뜨물 같이 뽀얀 꽃은 주로 저녁에 피지만 뽀얗다 못해 푸른 빛깔은 서늘하도록 차갑다. 남들이 들판에서 해바라기를 할 때 과꽃 피는 뒤뜰에서 혼자 익는 조롱박, 찬바람 된내기에 시달리면서 단단하게 익는데 날씨는 잠포록했다.

가을 날씨는 맑고 청량한 줄 알고 있으나 가랑비가 날리고 바람이 부는 등 뜻밖에 어수선하다. 익어 갈수록 추운 날씨가 한 단계 숙성될 때마다 수반되는 시련을 닮았다. 지금껏 익힌 것은 벼이삭과 땅콩처럼 따스한 날씨 속에서였으나 늦게까지 익을 때는 찬 서리를 동반한다. 톱질을 해야 될 만큼 단단한 박처럼 평생의 연륜을 자랑할 수 있으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은 걸까. 겉만 슬쩍 익히기보다 속속들이 영그는 그런 익힘을 구도해 본다.

 

/ 이정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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