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무슨 색깔일까. 깎아 놓은 사과의 속살처럼 붉게 번져가는 노을을 보며 내 삶을 돌아본다. 활짝 핀 작약처럼 함박웃음 짓던 날도 있었고, 나뭇잎처럼 맥없이 떨어지던 날들도 있었다. 누군가 다시 지난날을 살 기회를 준다면 나는 더 잘 살 수 있을까. 그러나 다시 사는 것도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 순간으로 돌아가서 또다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까 봐 두렵다. 나는 지금 삶의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아마도 오후의 끝자락이 아닐까.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이 흐린 필름이 되어 기억의 영사기에서 돌아간다. 무성영화처럼 치직 거리며 아픔과 기쁨이 함께 넘실거린다. 내게 남겨진 날들은 어떤 것들일까. 나도 황혼에 멈춰 서서 다리를 쭉 뻗고 지난날을 즐길 수 있을까, 지나간 날들 속에서 남아있는 나날을 본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이제 하루 일을 마치고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바닷가 선창에서 만난 노인이 스티븐슨 집사에게 한 말이다. 스티븐슨은 사는 동안 자신의 일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일에 헌신한 사람이다. 비록 집사였지만 자신이 대 저택을 굴러가게 하는 소중한 임무를 지고 있다는 소명감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그는 홀로 황혼을 맞이한다.

삶에 있어서 일은 중요하다. 자신이 일생을 걸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러나 그 일이 자신의 삶 전체를 옭아맨다면 과연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일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한다면 그건 옳은 선택일까. 일과 삶 사이에서 잠시 생각에 젖는다. 일도 삶도 어정쩡하기만 한 나는 삶이 이래서는 안 된다고 도리질을 치다가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나를 다독인다.

대저택의 집사인 스티븐슨은 평생 일에 헌신하며 가정을 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임종도 일 때문에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일생을 바쳤던 집이 새 주인인 패러데이에게 넘어간다. 그도 붙박이처럼 저택에 남게 된다. 새 주인의 제안으로 생에 처음 여행을 떠나는 그가 과거에 사랑이라는 감정을 가질 뻔했던 여인을 만나러 간다. 그의 선택 여하에 따라 그의 삶 속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도 있었던 켄턴을 만나러 가는 길에 삶을 돌아본다. 『남아있는 나날(The Remains of the Day)』은 그 여행 중에 과거를 회상하며 인생의 황혼에 서서 조곤조곤 지난날을 회상하는 책이다.

나는 그의 삶이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비판의식 없이 자기 일과 자신의 주인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하며 살아온 세월에 자긍심과 강한 신념을 갖고 있는 스티븐슨. 과연 그의 삶이 옳은 걸까 의구심을 가져본다. 그는 나름대로 튼실한 인생관과 직업관이 있다. 그리고 그는 황혼에 홀로 서 있으면서도 그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묘한 연민이 느껴진다. 잘못된 신념에 사로잡혀 인생을 저당 잡힌 것처럼 보인다.

소중한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는 것은 일 하나만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과 가족 그리고 사랑이라는 날실과 씨실이 만나는 교차점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날실과 씨실에는 여러 가지 중요한 일들이 가득하다. 그 여러 가지 색깔을 가진 일들은 그 순간에 돌보고 꿰어야 아름다운 문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 순간을 놓친다면 삶은 비뚤어진 문양이 되고 어울리지 않는 그림으로 가득한 천이 될 것이다.

한 눈 뜨고 꿈을 꾸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 일은 나의 행복을 영위하기 위한 일부이지 일이 전부가 되면 안 된다. 그건 일의 노예지 인간의 삶이 아니다. 일과 사랑 그 중심축에 서서 균형을 맞추며 시소 놀이처럼 사는 것이 삶이 아닐까.

 

/ 김나비 시인. 주성초등학교병설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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