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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와 청포도
호미와 청포도
  • 함께하는 충북
  • 승인 2019.08.2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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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을 맞은 여동생들이 머리도 식힐 겸 바닷가에 다녀오자고 한다. 청주에서 세 시간 가까이 달리면 가는 우리 국토 최동단 호미곶을 여동생 둘은 처음이라고 한다. 바다에 인접한 예의 광장에 도착하니 가까이 상생의 오른 손이 보인다. 갈매기가 상생의 손 다섯 손가락 끝에 한 마리씩 그림처럼 앉아있다. 갈매기가 떠나기 전에 뒷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야한다고 막내가 애를 달군다. 그런데 정작 나의 시선을 잡는 것은 우뚝하면서도 말없이 멀리서 온 사람들을 은근 환영하는 등대이다. 직장 동료들과도 몇 번 호미곶을 다녀왔지만 등대를 그저 지나친 것이 늘 서운하기도 했었다.

호미곶 등대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등대로서 등탑의 높이는 26.4m 내부는 6 층으로 되어 있다. 등탑은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붉은 벽돌만으로 조적된 팔각형으로 르네상스식 건축물로서 창문의 위치를 각층마다 다르게 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으로도 존재가치가 높다. 1908년에 첫 점등으로 빛을 밝히었으니 어머니보다 이십년이나 먼저 이 땅에 태어나 동해를 기키며 어둠속에서 빛이 되어준 역사적인 증인이기에 바라만보아도 흐뭇하다. 동생들은 더위를 떨쳐내려 해안단구로 내려가 무릎까지 바다에 넣고 갈매기 따라 넋을 잃고 있다. 오늘은 정말 맘먹고 등대를 바라보며 가까이 앉아 등대 이야기를 듣는다.

등대는 누워 잠을 자지 않는다. 낮 동안 뜨거운 태양아래 서서 단련하고 밤에는 뜬 눈으로 바다의 배를 이끌어준다. 저 하늘 달님 별님을 벗 삼아 매일 밤 내일의 할 일을 꿈으로 엮어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 그랬다. 8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해 누에를 치고 새끼 돼지를 사서 머리에 이고와 키웠다. 그걸 팔아서 우리들 옷을 사입히고 종손집 며느리로서 일 년 열 두 번의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 등대 덕분이랄까 팔남매는 세상의 바다를 헤엄쳐 잘 건너왔다. 우리가 이제 어머니의 등대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받은 사랑을 되돌려 드릴 때라고 서로 격려하며 하룻밤 지낼 섬집으로 향한다. 숙소로 얻은 펜션도 바다에 가까이 인접하여 파도소리가 곁에서 운다. 방도 넓고 네 벽면을 고운 하늘색으로 꾸며 마음마저 푸르러진다. 떠나올 수 있어 감사하다. 함께 올 수 있도록 착한 동생들을 나아준 엄마가 새삼 고맙다.

내일을 위하여 잠을 자야한다. 그래도 언니라고 나를 믿으며 꿈나라로 간 동생들 코고는 소리가 사랑스럽다. 잠들기 아쉬워 창문을 열고 대보항을 살피니 멀리 등대가 보인다. 어둠속에 핏기 옅어진 엄마의 얼굴빛처럼 등대형상도 흐릿하다. 100세까지 건강하시려니 했던 엄마가 작년 겨울부터 치매 증세와 콩팥 기능이 떨어져 아프리카 소년처럼 말라가고 있다.

어느 덧 어둠이 짙게 내려 밤바다가 꽃처럼 피어난다. 바다는 잠들지 않고 파도를 만들고 울고 있다. 누가 어머니의 영혼을 제 맘대로 데리고 다닌단 말인가? 의사는 약보다 혼자두지 말고 가족 간의 대화가 치매를 더디 한다고 일러주었건만 뱃속으로 나은 팔남매는 아직 엄마 곁에서 밤을 새우진 않는다. 이젠 나라도 일주일에 단 두 번이라도 엄마 곁에 누워 숨소리를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잠은 더욱 멀리 사라진다.

다음날 새벽 일출을 보려고 문을 열고 나서는데 동생들도 모두 일어나 따라나선다. 호미곶 일출은 포항 12경중 첫째라며 막내가 차로 빨리 가서 가까이 보자고 재촉한다. 장마철인데 다행히 비도 내리지 않아 찬란한 새벽 일출을 볼 수 있었다. 대보항 위로 하늘이 온통 노랗고 오렌지빛으로 물들어 말갈기처럼 뻗치고 새벽 어선이 그림처럼 떠 있다. 바알간 해가 점차 떠오르니 첫날밤 사랑처럼 황홀하여 눈을 떼지 못한다. 호미곶 광장 왼편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서 숙소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여러 번 왔지만 대보항을 끼고 걷는 길은 처음이다. 5분 여 걸었을까 왼편 숲길에 청포도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무슨 연유일까? 육사시인의 고향은 안동시 도산면인데 뜬금없이 청포도 시비라니 의아함과 가슴 두근대며 시비 뒷면을 살펴보았다.

1937년 포항송도방문 당시 오천포도원을 방문하여 청포도의 시상 얻음

1939년 문장지에 ‘청포도’ 발표.

위와같은 기막힌 글귀를 접하니 우연의 일치라는 기쁨이 솟구쳐온다. 얼마 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육사 문학관을 다녀왔기에 더욱 관심이 쏠리는 것이다. 독립운동으로 만주에 갔다 귀국길에 검거되어 일주간이나 서울형무소에 구류되어 포항의 동해송도원에서 요양했다는 기록을 본 일이 회상되는 것이다. 호미에서 그 사실을 확인하니 이 만남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포도원은 여기서 얼마나 멀고 어디에 있는지 그곳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조식을 간단히 하고 숙소 주인에게 물어보니 바닷길 따라 30분정도 가면 동해면이 나오는데 그 주위가 아닐까 본인도 무언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T맵에 동해면을 치고 달려가니 동사무소 입구에도 청포도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일단 안도의 숨을 쉬며 사무실로 뛰어 들어가 육사 시인이 머물던 곳이 어딘가 물으니 아쉽게도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청포도의 배경이 되는 포항시 동해면과 오천면의 일부지역 중에 일제강점기 때 일인들이 경작했던 동양최대의 포도밭이 있었는데 현재는 해병사단이 자리잡고 있어 그 흔적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시 구절을 음미할수록 시인은 바다를 보며 청포도 곁에서 이 시의 시상을 얻었음이 충분히 짐작된다. 흰돛단배 밀려서 오던 영일만을 바라보며 시인은 얼마나 간절히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갈구 했던가! 1944년 해방을 보시지 못하고 40세에 생을 마치면서 독립운동으로 17번이나 감옥을 드나든 분! 찾을 길 없는 오천포도원이여 영일만이여 안녕히!

그렇게 흔적주위를 갈구하다 동생들과 나는 시인이 바라본 동해바다를 맘에 품고 다시 호미곶으로 돌아왔다. 호미특산인 돌문어로 간단히 중식을 하고 어머니 드릴 또 한 마리 포장을 차에 싣고 의연한 등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려운 가운데 호미곶을 찾아왔지만 뜻하지 않은 윤동주 시인의 흔적을 안겨주어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한 또 한사람의 등대를 가슴에 세우게 되었다. 우리 8남매의 등대였던 어머니도 언제 우리 곁을 떠나 하늘사람이 된 다 하더라도 우리는 담대히 갈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다짐이 동생들 어린 마음에도 깃들기를 간절히 소망해본다.

호미곶으로 발길이 향한 것은 애초부터 등대같은 사람이 그리운 것이었을까? 가슴속에 청포도 같은 알알이 초록 희망과 자유와 평화로움이 영원히 동해를 푸르게 하길......

 

/ 박종순  전 복대초 교장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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