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달이 밝다. 바람이 서늘해서 창문을 열었다. 달챙이 숟갈처럼 생긴 달이 밤바다를 떠간다. 곪은 것도 아니면서 노르스름 번지던 달빛과 녹슨 것도 아닌 채 푸르스름한 숟갈 귀퉁이가 들창 가득 어린다. 보통은 모지랑 숟갈이고 충청도에서는 달챙이라고 불렀다.

하지가 되고 매지구름이 몰려오면 감자를 캔다. 둥주리 가득 챙겨서 광에 들이고는 쪄먹기도 하고 수제비를 끓였다. 그런 날은 작업이 만만치 않다. 아수 동생 꾀보는 미리감치 나가버렸다. 달챙이 숟갈을 들고 언니랑 동생과 양푼을 끼고 앉아 얼굴이며 팔뚝이 허옇게 되도록 긁는다. 쉴 참이면 저마다 허옇게 묻은 줄은 까맣게 잊은 채 키득거렸다. 손목이 시고 아파도 팍신팍신 분나고 먹음직스러웠는데……

미나리를 다듬어서 물을 채우고 달챙이 숟갈을 넣으면 거머리가 기어 나왔다. 한낱 숟갈인데 몹쓸 벌레가 제풀에 도망친다. 구진할 때 할머니는 사과를 긁어 잡수셨다. 반을 가르고 말간 속살을 파내셨다. 대가리 푸른 무도 사근사근 갉아 드신다. 지금 같으면 믹서로 드르륵 돌리겠지만.

반달 모양이 된 것은 수많은 감자를 긁어댄 탓이다. 가마솥 바닥의 누룽지를 긁어내기도 했다. 다르게는 모지랑 숟갈이라고도 부른다. 모지랑 빗자루와 모지랑붓 모지랑 삽도 있다. 쓰다 보면 파이고 닳아서 몽당에까지 이른다. 닳고 닳은 몽당은 모지랑보다 짤막한 느낌이었지. 아침이면 몽당치마 입은 큰언니가 모지랑 비로 마당을 쓸었다. 끝이 해진 몽당치마에 하도 쓸어서 모지랑 빗자루.

책가방에도 도토리 키재기 몽당연필 들었다. 쓰다 쓰다 나중에는 볼펜 뚜껑을 끼우고 침까지 묻혀가며 쓴다. 손때가 묻고 정이 들었다. 혹 잃어버려도 그 연필이 더 눈에 밟혔다. 물자가 귀해서 똑같이 아까운데 닳고 닳은 연필이 더 오래 생각났다.

모지라져서 모지랑이든 끝이 닳아서 달챙이든 둘 다 오목한 숟갈이었다. 달챙이라면 좀 더 순하게 들렸다. 충청도 사람 하면 어쩐지 양반스러운 느낌 같은 것일까. 달챙이 연필도 치마도 아니고 숟갈만 달챙이다. 오목한 숟갈 때문에 시꺼멓고 딴딴한 감자가 살피듬 하나 다치지 않고 말짱 긁어진다. 그렇게 벗긴 감자는 참하고 부드럽다. 괜찮은 손칼이다. 놋쇠 자체도 예리하지만 감자도 드센 작물이었다.

그나마도 왜 숟갈이고 달이었는지 몰라. 달이야 초하루 보름마다 차고 이우는데 얌전하고 해박한 충청도 양반들은 어쩌다 보름달일 때는‘달도 차면 기운다’면서 일이 잘 될수록 자중했다. 얼마 후 이울어질 때도 멋스럽게 달챙이 숟갈에 비유하면서 다시 차오를 것을 생각하듯 훗날을 기약했을 테니까.

누가 충청도 토박이 아니랄까 봐 멋대로 상상이다. 빛깔을 보면 낮달보다는 초저녁 떠오르는 초생달 여전하고 허구한 날 긁어대는 통에 그리 되었다. 온달에 챙을 씌운 폼이지만 땡볕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비슷해서 그렇게 토속적인 이름이었다. 청풍명월 양반의 습성대로 어떤 경우든 유유자적한 것도 소싯적 본 숟갈 때문이었나?

달래강의 통나무배도 그렇게 생겼다. 밤중에 배를 타고 건너다보면 무뚝뚝한 사공은 나룻배만 젓는다. 불현듯 강 복판에 떠가는 조각달 나룻배. 보통은 노를 젓는데 이것은 삿대도 없이 바람에 삐걱 삐걱 소리만 들렸다. 그 정경을 본 충청도 어떤 양반이 놋숟갈 생각하며 달챙이라고 했을까.

민숙이 아버지는 뱃사공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겉보리 두 되씩 추렴해서 뱃삯으로 주었다. 하지만 낭비벽이 심했다. 민숙이는 학교 갈 때마다 용돈 좀 타려면 눈물범벅이 되었다. 학용품 하나 신발도 변변한 게 없다. 남이 쓰던 가방에 남의 옷을 물려 입었다. 그나마도 부식거리는 어머니가 품을 팔아 근근이 마련했다.

쌀은 비싸서 엄두도 내지 못하고 먹느니 허구한 날 감자였다. 감자밭에 품 팔러 가서 얻어왔으니 커 봤자 마늘쪽만 하다. 그것을 일일이 긁어대면서 가난살이에 눈물을 훔치곤 했으니 가슴도 억장으로 파였다. 민숙이는 지금도 감자는 쳐다보기도 싫다는데, 야속한 아버지에 무능한 남편이었어도 나룻배 저을 때는 신선처럼 해사했는데 세상 뜬 지 벌써 십 오륙년이란다.

밤이 깊었다. 무심히 하늘 보는데 덩그러니 달챙이숟갈. 달챙이는 감자를 긁어대면서 이울고 한밤중 동막골 넘어가던 그 달은 제 살 모퉁이 떼어내며 달음질쳤다. 도장골에서 느티재 성황당 넘어갈 때도 보름달 뽀얀 살은 야금야금 떨어져 나간다.

간신히 둥글어진 보름달이 숲을 가르고 산을 타면서 누군가 몰래 갉작대기라도 한 것처럼 눈썹같이 작아져도 다시금 쑥쑥 차오르던 한살이. 얼마 후 새벽이면 서쪽 하늘 지새는달로 사라졌다지. 초생달은 온달로 보름달로 둥글어지던데 달챙이 숟갈의 모지라진 부분은 추억으로 땜질되었으려나.

과도용 칼도 아닌, 감자 긁던 숟갈을 예스럽게 달챙이다. 자루 달린 놋숟갈과 쪽배같은 달이 오목하게 파인 모양은 시적이다. 어디 자료에 나온 것도 아니고 더구나 케케묵은 양반 타령일까만 충청도의 청풍명월도‘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었다. 모지랑도 분명 향수적이었으나 달챙이가 더 여유롭고 마음에 끌린다. 모지랑 하면 빗자루 붓 갈퀴 등 많은데 달챙이는 숟갈에만 통용되었던 것.

그렇게 파이자니 달포 해포 세월도 적지 않다. 눈감으면 저만치 똬리 튼 추억. 그을음 자욱한 부엌이 지나갔다. 부뚜막에는 자손물통이 있고 수저통 대접에는 모지랑 또는 달챙이라고도 했을 너덧 개 숟갈이 들었다. 우선은 감자 껍질 긁는 일이고 누룽지 눌어붙은 솥 밑바닥까지 말짱 뒤집어졌다. 오달진 숟갈이다. 지금도 감자를 찌면 얇은 숟갈을 쓰는데 그 숟갈만치는 아니다. 귀퉁이는 모지라졌어도 감자 긁을 때만큼은 최고였던,

놋숟갈이 새삼 정겹다. 우리 집에 있던 그 숟갈은 자루 달린 초생달이었을까. 구부러진 부분에 끈만 달면 되겠다. 조금씩 파일 동안 조각달에서 작은 섬같이 눈썹달처럼도 보이던 옛 물건이다. 내 고향 사투리였을 뿐인데 어쩜 그렇게도 간절한 느낌이었는지.

흔히 보는 그냥 숟갈보다 오목하게 파인 반달 모양 숟갈이 더 애틋하게 생각난다. 기쁘고 즐거웠던 날보다 마음 아픈 그 날이 훨씬 더 추억이었다. 달챙이라고 부를 때의 달 역시 때가 되면 가득 차오르듯 슬픔이니 아픔도 기쁨으로 차오를 테니까. 달챙이는 예스러워도 파이고 깎인 세월은 모질었다. 그래 오늘밤처럼 추억의 강에 닻을 내려도 보고 무심코 떨어뜨린 추억도 주워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닌지.

감자를 다듬고 가마솥 누룽지 긁어 먹던 시절도 가뭇없이 멀다. 오글오글 박힌 봄 감자 씨눈과 멍든 자국도 후벼냈다. 갓 캐 온 고구마도 벅벅 긁으면 발그레 살피듬이 비쳤다. 울퉁불퉁 새앙도 이 짝 저 짝 파내기 좋았다. 녹이 난 열쇠는 삐걱대면서 말썽이고 나는 또 그러거나 말거나 추억의 잡동사니를 들춘다. 달챙이가 아득아득 생각나는 7월 초 풍경이다.

 

/ 수필가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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