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네 시, 칭기즈칸 국제공항에 뚝 떨어진다. 공항을 나가자 울란바토르의 낯선 하늘이 새초롬하게 반긴다. 조금은 두렵고 조금은 설레는 새벽이다. 처음 대면하는 생경한 바람 냄새가 날개를 펴고 다가온다. 나는 바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기다리고 있는 도요타에 몸을 싣는다.

울란바토르에서 출발해 6시간째 초원을 달리고 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초록의 연속이다. 초록으로 펼쳐진 거대한 도화지 속에 기어가는 한 마리 개미가 퍼뜩 떠오른다. 나는 어쩌면 이 커다란 초원에 홀로 기어가는 개미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초원을 빠져나갈 수 없는 작은 개미처럼 나는 평생 지구라는 공간 속에 갇혀 바둥거리며 사는 작은 인간에 불과한 것이다. 모든 일상을 접고 날아온 이곳에서 나는 또 다른 나와 마주친다. 그동안 소리소리 지르며 살아왔던 내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무엇을 더 갖겠다고, 무엇을 더 잃지 않겠다고 고성의 시간을 보냈는지. 언젠가는 갈라진 손금을 길 삼아 홀로 이곳을 떠날 것을.

광활한 초원 위로 간간이 말 떼와 게르가 나타났다 사라진다.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이다. 초원밖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 누군가 풍경이라는 롤스크린을 자꾸만 옆으로 당기는 것 같다. 몇 시간을 달려 겨우 한 사람을 만난다. 말 위에 타서 말 떼를 몰고 가는 유목민이다. 나는 차를 멈추고 유목민을 쳐다본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며 유유히 초원을 떠돌고 있는 걸까. 굳게 다문 입술은 말이 없다. 서두르지 않는 달관한 구름처럼 그가 눈웃음을 남긴 채 조용히 지나간다.

얼마나 달렸을까. 언덕에 돌무더기가 보인다. 어워라는 일종의 서낭당 같은 장소라고 한다. 돌을 무덤처럼 쌓고 가운데에 나무를 꽂아놓았다. 그리고 그 나무에는 빨강, 하양, 파란색 천을 감아놓았다. 몽골 사람들은 초지를 제공하는 땅과 그 초지를 키우는 태양, 그리고 비를 내려주는 하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앞날에 축복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며 어워를 세운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종의 토템인 셈이다, 어워의 종류는 알탕 어워, 길 어워(고개 어워), 샘 어워, 약수 어워(성수), 초원 어워, 기념 어워, 경계 어워 등이 있다고 한다. 몽골인들은 전쟁을 떠날 때도 어워에 제의를 하고 하늘에 비는 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초원에서 어워는 높은 산이나 들에 세워 방향을 가늠하는 일종의 방향자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토템이란 인간이 세계와 사회 속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행위라고 했다. 즉 토템의 수립은 기능적인 행위이기보다는 인식론적인 행위, 더 나아가서는 미학적인 행위다. 사람이 사는 곳엔 어디나 비슷한 생각과 비슷한 의식이 행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어쩌면 작고 불완전한 인간의 끝없는 불안 때문은 아닐까.

나는 길을 멈추고 어워 앞에 선다. 돌 세 개를 주워 시계방향으로 세 번을 돌면서 한 개씩 올려놓는다. 푸른 하늘과 가도 가도 끝없는 초원 그리고 뜨거운 태양 아래 한낱 작은 점에 불과한 나를 돌아보며 손을 모은다. 이렇게 미약하고 초라한 내가 무탈하게 살게 된 것도 감사하고 앞으로도 무탈하게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살아가면서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해 달라고 빈다. 나로 인해 잠 못 드는 사람이 없기를 기도한다. 알게 행하는 상처는 바로 잡겠으나 모르고도 남들의 가슴을 긋는 일이 없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두 손 모은다. 그저 조용히 내 일을 하며 고요히 이슬처럼 스러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한다.

내가 이곳에서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일까. 문명에서 한 발작 떨어진 초원에서 마주친 내 모습을 보다 냉정하고 겸허하게 보는 것이 아닐까. 나의 바깥에서 나를 관조하며 나의 참모습을 찾아가리라. 인생이란 어쩌면 끝없이 나를 찾아가는 기나긴 여정이 아닐까. 오늘 그 긴 여정에 한 발짝 더 걸음을 보탠다.

 

/ 김나비 시인, 주성초병설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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