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도가 한 때 ‘공청도’라는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청도라고 불리웠던 이유는 1644년 벌어진 심기원 옥사 때문이다. 심기원 옥사란 청주 출신 점쟁이 채문형이 좌의정 심기원을 선동하여 회은군 이덕인을 추대한 사건이다. 심기원의 부하 황헌이 변심하여 밀고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심기원을 비롯한 반청 일당 등의 처형이 서둘러 이루어졌으며 심기원과 친분이 있던 이시백 형제와 임경업 장군도 소환되어 고문을 받고 죽게 된다.

역모를 꾸미도록 심기원을 선동했던 채문형이 살던 충주목은 죄인이 살던 곳이라 하여 충원현으로 강등된다. 조선시대의 도(道)이름은 행정구역 가운데 인구가 많은 두 목의 이름 앞 자를 따서 불렀는데 충청도는 충주가 제일 많았고 청주가 다음이었기 때문에 충청도였다. 그러나 충주가 충원현으로 강등되는 바람에 인구가 세 번 째로 많은 공주를 앞에다 붙여 충청도라는 이름은 공청도가 되었다. 법으로 정해진 강등기간 10년이 지나고 충원현이 충주목이 되면서 공청도는 다시 충청도로 원상회복이 된다. 상상이지만 공청북도, 공청남도라는 이름을 생각하니 여간 어색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연좌제는 가문, 지역을 가리지 않고 적용되었으니 실로 무서운 형벌이다.

심기원 옥사는 친청과 반청의 갈등이 빚은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후에 친청 세력인 김자점 일파가 권력을 장악하고 훗날 효종이되는 봉림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심기원 옥사를 통해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임경업 장군은 1594년 충주에서 태어난 무관으로 명‧청 교체기의 변혁 속에서 병자호란 등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무관이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면서 무관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조선을 대표하는 명장으로 백성의 신망을 받았다. 후에 명나라에 망명하여 청나라와 싸우다 생포되어 18개월 동안 구금된다. 심기원 옥사로 인해 인조의 요청으로 조선으로 압송된 장군은 인조의 친국을 받으며 역모 가담을 극력 부인하지만 형신을 받다가 죽게 된다.

충주시 단월동에 위치한 사적 제189호인 임충민공 충렬사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장군의 원한을 풀어주고 옛날의 관작을 회복하기 위해 지은 곳이다. 1706년 장군에게 충민이라는 시호가 내려지고 1726년 충렬사가 준공된다. 정조는 직접 비문을 지어내려 어제달천충렬사비가 세워진다. 왜군을 물리치기 위한 대표적인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라면 청나라를 물리치기 위해 노력한 대표적인 인물은 임경업장군이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이하여 임충민공 충렬사를 들러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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