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모를 꽃이 바람에 살랑인다. 한들한들 춤을 추는 듯.

돌계단 끄트머리에 풀이 올라왔다. 송곳 하나 꽂을 틈도 없는데 며칠 후 꽃이 피었다. 한참을 바라보았다. 비가 와도 빗물조차 고이지 않는 곳에서 용하다. 의지할 데라곤 계단 벽뿐이고 땡볕에 시달렸다. 비좁은 속에서 볼품은 없는데 많지도 않은 단 한 포기가 밟는 대로 자라 꽃을 피웠다.

십 년 전 우리 집 돌밭에서 피던 채송화도 그랬다. 언젠가 보니 딱딱한 돌밭에 채송화 싹이 바글바글했다. 돌밭에서 어찌 자라겠느냐고 무심코 뽑아냈다. 그 중에서 살아난 포기가 겨끔내기로 피고 지면서 꽃범벅을 이루었던 것이다. 흔한 게 꽃이고 탐스러운 것도 많지만 필 자리가 아닌데서 피는 의지가 대견하다.

언젠가 채송화 하나가 뽑힌 적이 있었다. 옮겨 심는다 해도 워낙 딱딱해서 살아날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밭둑에 심었더니 빛깔이 영 희미했다. 돌밭보다는 거름도 좋은 자리다. 싹은 실하게 올라오는데 꽃만 보면 돌밭에서 필 때만은 못하다. 실낱같은 뿌리보다 엄청난 꽃무더기는 자갈투성이 돌밭에 뿌리박고 생짜로 핀 까닭이었다. 악조건은 기회가 된다. 돌밭에서 자란 까닭에 어디서든 적응이 가능하고 꽃도 훨씬 예쁘게 핀다면 거름흙에서 자라는 게 능사는 아니었다.

내 안의 돌밭을 두드려 본다. 옥토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서든 꽃 피울 수 있는 의지가 우선이다. 그렇게 뿌리박는 대로 피는 식이라면 오십년 지기 박토는 저절로 윤택해진다. 같은 꽃이라도 이슬을 머금을 때가 곱다. 살 동안도 보면 눈물겨운 날들이 아름답다. 필 자리가 아닌 데서 피는 의지라면 어떤 경우든 향기로운 삶으로 바꿀 줄 안다. 쉽사리 핀 것보다는 곡절 속에 새긴 꽃망울이 더 고울 수 있다. 힘든 만큼 간절해지는 삶도 소망이다. 획기적이다.

비탈에서 핀 꽃이 오늘 따라 예쁘다. 현기를 무릅쓰고 피어서 그런 것일까.

선홍색 원추리가 넘어질듯 불안하다. 보라색 꽃이 만발한 싸리나무도 활대처럼 굽었다. 비스듬히 선 나무들 역시 아슬아슬해 보인다. 장대비에 시달렸는지 뿌리가 드러났고 아예 쓰러진 나무도 있다. 대여섯 발짝만 가도 평평할 텐데 아쉽다. 좀 더 올라간 산자락에도 원추리와 싸리나무는 있었고 훨씬 탐스러운데 애착은 가지 않는다. 비탈에서 자라 볼품은 없지만 별나게 마음을 끄는 것도 섭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수록 한편의 詩다. 가파른 비알에서 숨차게 피는 꽃이 좋았다. 취향도 취향이지만 나의 삶 역시 손에 땀을 쥐듯 힘겨워서 그런 꽃을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나보다 힘든 누군가를 본 것 같은 뭐 그런 느낌이었다. 힘들다고 동동거리던 일이 무색해진다. 나만 그렇게 사는 줄 알고 있다가 비탈의 꽃을 보게 되었다. 나도 힘들지만 더 힘든 누군가가 있다면, 그렇게나마 위로받는 것도 상대적 행복이다. 도서관 후문을 돌아간 나지막한 언덕의 풍경이 그렇게나 인상적이었던 것.

늦장마에 무너질 걸 생각하면 그 행복도 오래지는 않을 테지. 그런 중에도 작은 것에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면 어기찬 삶이다. 기울어진 비탈 또한 우리가 봤을 때만 그럴 뿐 비스듬한 산 자체를 보면 오히려 똑바르다. 산은 경사가 졌는데 거기 사는 초목이 반듯하면 부자연스럽다. 맞추는 거다. 바람이 불 때는 기울어져야 하고 가물 때는 비를 기다리며 의지를 키운다. 비탈이라 더 예쁘고 눈길을 끈다. 힘든 만큼 간절해지는 삶도 소망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힘든 건 있다. 꽃밭도 아닌 데서 피는 존재들처럼.

폐허 속의 꽃은 고왔다. 돌보지 않아도 혼자서 핀다. 언젠가 뒷산을 끼고 돌다가 본, 까까비알일수록 고왔던 잡초 속의 꽃이 생각난다. 필 수 없는 데서 피는 것을 최고로 알았고 좌우명으로 삼고는 어떤 경우에도 아름다울 수 있는 삶을 추구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진흙에서 핀 연꽃을 보았다. 폐허에서 핀 것도 대단한데 진흙에서도 그리 곱다니 말할 수 없는 감동이다. 어쩌다 물이 맑으면 희미해지는 꽃잎도 특별하다. 삶이라는 물 역시 더럽고 탁해도 연꽃처럼 필 수 있는 여건으로 바뀐다. 얼핏‘폐허 속의 꽃’보다는 힘들겠구나 싶었지만 어차피 세상은 점점 더 어려운 뭔가가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폐허 속의 꽃처럼’에서‘진흙 속의 연꽃처럼’그리고 이번에는‘시궁창의 꽃처럼’이다.

갈수록 절박한 이미지가 묘한 느낌이었는데 얼마 후 오수와 폐수가 흘러나오는 시궁창의 꽃을 보았던 거다. 연꽃이 피는 진흙도 더러웠으나 시궁창 물받이는 늪처럼 끈적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예쁘게 핀 것을 보고는 다시금 좌우명을 돌아보았다. 꽃으로 보기에도 민망하지만 거기서도 핀 것을 생각하면 잘 가꾼 정원일 때는 얼마나 근사할지 짐작이 간다. 폐허 속에서, 진흙 속에서보다 훨씬 악조건이다. 더럽고 냄새는 또 얼마나 심한데, 그것을 무릅쓰고 피면서도 향기는 똑같다니 놀라울 밖에.

빈약한 꽃보다 향기가 돋보인다면 시궁창의 꽃은 독보적이다. 꽃밭도 아닌 데서 피는 꽃들의 메시지를 새기는 거다. 잡초 속이니 진흙도 못 견딜 노릇이다. 시궁창을 생각하면 그나마 낫다고 여길 테니 거기서 피는 꽃이야말로 눈물겨운 존재다. 향기까지 있어야 한다니 더더욱 부담이었겠다. 그 위에 냄새조차 지우는 향기라면 게다가 온갖 더러움을 뛰어넘을 향기가 되려면 시궁창에서도 꽃을 피우는 노력이라야 가능하겠지.

앞으로 내 삶의 터전이 자갈밭 또는 시궁창이 될지도 미지수나 같은 이슬도 귀뚜라미에게는 노래가 되고 뱀은 독을 만든다. 멀쩡한 꽃밭도 방치하면 쑥대밭이 된다. 자갈밭도 공들이면 꽃밭으로 바뀐다. 잡초 속에서 진흙에서 시궁창에서까지 아름다울 수 있다면 품격 문제다. 필 것만 생각하는 꽃은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다. 봄 들판 꽃다지도 겨우내 눈 속에서 꽃을 준비했다. 악조건을 극복하면 예쁘지 않은 게 없다. 꽃밭도 아닌 데서 피는 존재들 때문에 된비알 돌밭도 진흙투성이 연못도 꽃밭이 된다. 꽃밭도 아닌 데서 피는 꽃들의 메시지가 참 향기롭다.

 

/ 이정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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