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5월은 온통 꽃으로 계절의 여왕을 수놓았다. 어느새 가로수로 자리한 이팝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린 하얀 쌀알, 알맞게 늘어진 등나무꽃 보랏빛 불등, 그리고 과수원길 넘어 산언덕 어디나 향기고운 하얀 아카시아꽃이 마음 밭을 두드린다. 그 중에서도 오랜만에 아니 난생처음 ‘바람꽃’을 만나 잠을 이룰 수 없는 수많은 5월의 밤을 보내고 있다. 봄에 피는 대부분의 꽃들이 청순하고 사랑스러운데, 이 바람꽃 종류들이야말로 가장 여성스럽고 한국적인 고운 미(美)와 성품을 가득 지닌 꽃이라 한다. 나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만주바람꽃, 백두바람꽃, 변산바람꽃 등 그 종류가 20여종에 이르다니 그 존재의 의미와 다양한 생김에 놀라움과 신비로움을 금할 길 없다.

약하게 부는 바람에도 꽃잎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식물체가 매우 작고 약하게 생겼으며, 바람처럼 피었다가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하여 바람꽃인지? 외적으로는 그리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겨움과 순박한 미를 갖추었고, 내적으로는 차가운 땅을 뚫고 나오는 강한 생명의 기운을 품고 있는 것 또한 그 만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변산바람꽃의 본고장인 변산을 비롯한 전남북 지역과 경남 일부 지역에서는 2월 하순부터 피기 시작하고, 수도권 지역과 서해 무인도 지역에서는 3월 초순부터 너도 바람꽃이 피면서 봄의 바람꽃은 보는 이에게 애절함을 안도록 작고 여리어 그 곁을 쉬이 떠날 수 없음도 사실이다. 바람꽃의 속명(屬名)은 아네모네'(Anemone)이다. 아네모네는 그리스어로 '바람의 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에 얽힌 얘기 또한 애잔하다. 옛날 꽃의 신 '플로라'에게는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시녀가 있었는데 그 시녀의 이름이 '아네모네'이다. 그런데 플로라의 남편인 바람의 신 '제피로스'가 그 아네모네를 그만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플로라는 아네모네를 멀리 내쫓아버리지만 제피로스는 바람을 타고 그녀를 곧 뒤쫓아 가게 되고 결국 둘은 깊고 뜨거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켜본 플로라는 질투에 불탄 나머지 아네모네를 꽃으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이토록 신비로운 꽃을 처음 보고 관심을 기울이게 된 연유는 보탑사를 찾아간 덕분이다.

진천의 보탑사는 고려시대 절터로 추정되는 곳에 대목수 신영훈 장인의 감독 하에 1996년 창건된 절이다. 보탑사가 주목받는 이유는 신라시대 황룡사 구층목탑을 모델로 한 3층목탑 양식이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걸어서 내부를 오르내릴 수 있는 계단을 설치한 목탑이라는 점이 바람꽃 못지않게 내 영혼을 사로잡는다. 못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짜맞추는 전통 한옥방식을 고수하여 1층에 사방불, 2층에 경전, 3층에 미륵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보탑사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삼층 목탑은 강원도산 소나무만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편안하고 안정감있게 사람들의 발길을 잡아준다. 무엇보다도 신라시대 이후 사라진 목탑을 재현했다는 역사적 가치를 지니며, 모든 이의 가슴에 자비심과 행복이 담기길 바라는 통일대탑으로, 보탑사는 우뚝하면서도 섬세하며 우아함을 지닌 보물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비구니 스님들의 발원으로 세워진 사찰이어선지 흔히 볼 수 없는 야생화와 풀꽃들을 정성껏 길러 목탑주위를 감싸고 있어 찾아온 중생들의 발걸음을 더욱 오래 머물게 한다.

아마도 2019 5월을 맞으며 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은 보탑사에서 만난 바람꽃이다. 그 곁을 자꾸 맴도는 내게 바람꽃은 다소곳 고개 숙이며 다가오는 산바람을 조용히 안았다 보내곤 한다. 3층 목탑의 눈동자로 바람꽃을 삼고 싶다. 사실은 5월 5일 어린이날 처음 바람꽃을 만났고 또 보고 싶어 중순이 지나며 어머니를 모시고 두 번째 그곳에 가게 되었다.

돌아오는 길에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만든 곡 ‘바람이 머무는 날’을 들으며 목탑 옆에서 다소곳 잠들 바람꽃을 살며시 떠올린다.

바람이 머무는 날엔/엄마 목소리 귀에 울려

헤어져 있어도, 시간이 흘러도/어제처럼 한결같이

어둠이 깊어질 때면/ 엄마 얼굴을 그려보네

바람 속에 들리는/그대 웃음소리 그리워

‘나처럼 한 남자의 아내가 되지 말고 만인의 연인이 되라’던 성악가의 어머니는 이젠 딸의 이름도 잊어버리셨단다. 아흔 셋 내 어머니에게도 마지막 여행이 될까. 목탑 그 아름다운 날개를 보여드리러 갔는데 어머니는 ‘예쁘구나’ 힘없는 한마디 바람에 던질 뿐이다. 이제 어머니의 관심은 무엇일까? 차창에 기대어 무언가 중얼대는 엄마 목소리는 마치 바람꽃의 속삭임 같다. 우리는 모두 바람의 딸이었을까? 그래서 다시 바람꽃으로 피어나고 싶은.

 

박종순 / 전 복대초 교장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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