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초 <제주 4.3사건 바로알기 역사탐방>을 위해 제주도를 다녀왔다. 제주도민을 제외하고 아직은 국민들에게 생소할 수도 있는 ‘4.3사건’에 대해 바로 알자는 취지로 전국의 블로거, 미디어크리에이터, SNS창작자 등이 모여 역사의 현장을 둘러보고 왔다. 사실 가기 전까지만 해도 사건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그렇게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 몰랐다. 역사탐방이 시작되며 가슴에 달아주는 ‘동백꽃’의 의미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수업을 듣고 현장학습을 하면서 국내 대표 관광지라고만 알고 있던 제주도의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고 있던 아픔이 있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4.3사건’은 1947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제주도민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미 군정기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이 사건은, 현대사의 아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이며 갈등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제주 4.3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확정한 희생자 수는 약 1만 4천명이지만 비공식적인 집계에 따르면 3만 명으로 추정한다. 당시 제주 인구의 10분의 1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300여 마을이 사라졌고, 4만여 채의 집이 불태워졌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희생이 되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슴 아프다.

공식적인 연령별 희생자를 보면 당시 사건의 책임자들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를 알 수 있다. 10세 이하의 어린이 770명, 11~20세까지의 청소년이 2,464명, 21~30세의 청년 5,461명, 31~40세의 장년 2,291명, 이 밖에 41세 이상 연령대에서 3,245명의 희생자가 있었다. 여성의 희생도 전체 피해자 중 2,990명, 21%에 육박한다. 과도한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가 있었고 주민들이 돌아와야할 삶의 터전도 단순한 농경지로 바뀌면서 사라졌다. 뿐만 아니라 슬픔을 간직한 유가족들에게는 ‘연좌제’의 족쇄가 계속됐다. 감시 당하는 것은 물론 사회활동에 제약을 받았던 것이다. 공무원 임용시험, 사관학교 입학시범, 승진, 취직, 출입국 과정에서 피해를 겪은 것이다.

행사가 끝나는 날 4.3사건 유적지를 나오면서 기념촬영을 했다. 옆에 계시던 4.3사건 강사님이 충북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는 “노근리를 기억합니다”라는 구호를 하자고 제안하셨다. 1950년 7월, 미군이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철교 밑에서 한국인 양민 300여명을 사살한 사건이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을 말한 것이다. 바다 건너 제주에서 우리 지역의 아픈 역사를 알고 있고 기억해주겠다는 말씀이 너무 고마웠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억하는 것,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는 그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일지도 모르겠다.

 

/ 이기수 충북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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