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였던 충북에서는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배출됐다. 그중에서도 충북 진천군 출신의 이상설(李相卨)은 충북의 독립운동가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다.

진천군 덕산면 출생인 이상설은 동부승지였던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하여 서울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명석했던 그는 영어‧러시아어‧법률‧수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상당한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1894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986년 성균관 교수 겸 관장 등의 요직을 거쳐 1904년 보안회(조선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대항하여 위해 서울에서 조직된 항일단체)의 후신인 대한협동회 회장을 지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며 고종에게 5차례에 걸쳐 상소한다. 이후 돌에 머리를 부딪혀 자결을 기도하였으나 실패에 그친다. 자결을 시도하는 장면을 목격한 백범 김구는 당시의 모습을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술회한다. “"이날 민영환이 자살하였다 하므로 나는 몇 동지와 함께 민댁에 가서 조상하고 돌아서 큰길에 나서니 웬 사십 세나 되어 보이는 사람 하나가 맨상투바람으로 피묻은 흰 명주 저고리를 입고 여러 사람에게 옹위되어서 인력거에 앉아 큰소리를 내어 울며 끌려가고 있었다. 누구냐고 물어본즉 참찬 이상설이 자살하려다가 미수한 것이라고 하였다"고 말했다.”

1906년 영의정에 임명되지만 한 달만에 사직하게 된다. 이듬해, 고종의 밀지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이위종과 함께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세계에 알리려고 한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펼치나 일본과 영국대표의 방해로 거부당한다. 이때 함께 한 이준은 자결을 단행하며 일본의 압력으로 이상설에게는 사형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이준‧이위종에게는 종신형이 선고된다. 이후 귀국을 미루고 각국을 돌며 외교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친다.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사이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 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을 건설한다.

1917년 이상설은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한다. 죽기 전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했으니, 몸과 유품은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한다.

올해는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이 10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독립운동가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었을까, 이러한 해인만큼 우리 고장 출신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알게 된다면 의미가 있을 것이다.

 

/ 충북 SNS서포터즈 이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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