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에 날아든 물새를 본 것은 봄 햇살 부서지는 한낮입니다. 주변의 숲과 나무가 흠씬 잠겼습니다. 저수지의 새파란 물과 하얀 날개가 참 잘 어울린다 했는데 녀석이 돌연 길을 틔우지 않겠습니까. 양쪽 날개를 착 붙이고는 얼음 위의 조롱박처럼 미끄러지더니 순식간에 100m 저쪽으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망연히 바라보다가 아뿔싸, 그만 놓쳐 버렸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떨치기도 전에 푸른 하늘이 다가왔습니다. 물속에 비친 하늘에서도 날아갔을 텐데 허공에 길이 생길 동안 없어진 걸 알았겠지요. 물결이 잔잔할 때 보면 그 속애도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자맥질을 할 때마다 물새는 두 개의 하늘을 껴안는 셈이지요. 꼭 필요한 것만 탐하면서 그리 창공을 넓혀간 것입니다. 물새의 남다른 운치가 부러워집니다.

물새가 지나간 길은 그 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리마처럼 뻗은 길에 물결만 찰랑이는데 또 다른 물새가 날아듭니다. 잠시 전의 그 물새인지 아무튼 푸른 물결에 새하얀 물새가 새겨진 것은 한 폭 그림이었습니다. ‘누가 저 물 위에 새 을 (乙) 자를 썼느냐’고 했던 다섯 살 난 시인이 떠올랐습니다. 풍경만치나 아름다운 싯귀였습니다. 물새가 떠 있는 호수를 지나갈 때도 그 생각이 났습니다. 기발한 착상이라고 했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아름다운 모습에 감춰진 물새의 축축한 하루가 엇갈려 지나갑니다.

길을 틔우던 모습과는 달리 글자 모양의 연출은 자맥질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물갈퀴와 날개의 괴리감에 시달렸겠지요. 날개 밑에 물갈퀴가 있는 줄 생각이나 했을까요. 자맥질이 하늘을 날기 위한 방편이라면 현실 또한 눈물로 얼룩지게 마련입니다. 꿈을 생각하면 날개가 떠오르고 현실을 생각하면 물갈퀴가 친근합니다. 내가 본 물새가 대부분 자맥질을 하고 있었다면 뜻밖에 무거울 수 있는 날개의 이중성을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활주를 시도하는 모습이 특이합니다. 비행기처럼 활주로를 미끄러질 줄 알았더니, 저수지에는 활주로도 없는데 제법입니다. 그 외 어디서나 뜨고 내릴 수 있는 수직 이착륙도 가능합니다. 고도의 비행술을 자랑하는 묘기였지요. 자맥질과 날갯짓을 겸하기 때문에 활주는 물론 수직이착륙도 가능한 고도의 불시착이 습관화된 것 아닐는지요.

물 위에서 특이한 글자로 떠오른 뒤 날아간 것도 날개와 물갈퀴를 갖고 태어난 특권입니다. 여타 새라면 하늘로만 날아오를 뿐 물에 뛰어들지는 않습니다. 물새에게 자맥질은 콤플렉스라 하겠지만 우리가 볼 때는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것 같습니다. 자맥질을 멈추는 순간 죽을 수밖에 없다면 물가에서 틔워 낸 활주로와 날갯짓은 당연했습니다. 오늘 제가 본 풍경도 물이라는 추가영역 때문이었습니다. 날개와 물갈퀴는 분리될 수 없고 꿈과 현실도 당연히 함께 가야겠지요.

자맥질 도중에 날아갔습니다. 먹이를 찾는 중이었을까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는 않고 그래 날아갔을 테지요. 아기자기한 산새가 물정 모르는 철부지라면 물새는 산전수전 다 겪었습니다. 풀씨를 쪼아 먹다가 내키면 노래 부르고 투정이나 하듯 잠드는 산새도 예쁘지만 자맥질로 높이는 날개의 차원도 괜찮습니다. 산새는 자맥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콤플렉스가 없지는 않겠지만 허공과 물을 버르집는 고통에는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물새는 하늘과 물을 동시에 생존무대로 삼아야 했으니까요.

우리 하늘을 동경하듯 물새의 꿈도 하늘이었습니다. 찰박이는 물 가상이에서 먹이를 찾는다면 꿈과 현실을 헤매는 우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올라갈수록 푸른 하늘은 날개의 무게를 덜어낸 다음이었죠. 얼마나 풍경이었으면 다섯 살 어린이의 시심을 자극했을까 싶거든요. 무엇보다 자맥질로 연출된 풍경에 끌렸을 테지요. 물새의 하늘이 유달리 푸른 것도 자맥질에 따른 날갯짓 때문이었습니다. 자맥질 끝이라서 하늘이 더 멋져 보이듯 힘들 때 보는 운치 또한 고풍스러웠지요.

갑자기 나타난 물새를 보고 새 을 (乙) 자 어쩌구 했다가 복잡한 세상을 알고는 만감이 교차했을 거예요. 어릴 때는 신비하게만 생각했을 뿐 자맥질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비로소 날개 밑에 감춰진 자맥질을 생각하며 힘든 세월을 견디었을 줄 압니다.

눈감으면 명주 고름처럼 일렁이던 물결과 미끄러지던 물새가 다가옵니다. 전원 풍경이 각박한 일상의 돌파구라면 최소한의 무게로 삶을 저울질하고 싶습니다. 자맥질이 아니면 가라앉는 것처럼 이상만 추구해서도 힘들어집니다. 조율이 필요합니다. 자맥질이 아니면 하늘도 더는 꿈의 공간일 수 없습니다. 날갯짓과 자맥질 때문에 훨씬 푸르렀던 하늘처럼 삶도 꿈과 현실을 아우르면서 보다 높이 승화됩니다. 힘들다고만 할 게 아니었습니다.

이후 나는 그 때처럼 길을 틔우는 물새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맥질은 절박해옵니다. 어쩌다 가끔 보기는 해도 오래 전 물수제비나 뜨는 것처럼 담방담방 여울을 건널 때의 느낌은 아니었다는 거죠. 살다 보니 마음도 각박해진 것 같지만 자맥질 열 번에 날갯짓 한 번 정도의 삶이라면 물새의 운치도 배울 수 있겠지요. 자맥질은 눈물겹지만 날갯짓은 더 찬란하듯 운명은 힘들지만 그럴수록 꿈은 아름다웠다는 함수관계를 생각하는 겁니다.

물 위에서 참 고상하게 보이던 풍경이 또 한 번 스쳐갑니다. 나도 물새의 체질을 닮은 걸까요. 자맥질 열 번에 날갯짓 한 번 정도라면 괜찮지 싶어집니다. 어느 새 해거름인지 마음도 고즈넉해 옵니다. 물새도 이제는 둥지를 찾아갈 테고 계속되는 자맥질로 하늘은 넓고 푸르러지겠지요. 이상을 꿈꿀 동안도 하늘은 높아지고 그게 하늘보다 푸른 소망이라고 최면을 걸어야겠습니다. 자맥질에 단련된 삶을 추구하면서……

 

/ 수필가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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