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이 노곤하다. 씀바귀를 캐러 나왔다. 고랑을 파 뒤집으니 살찐 봄이 올라온다. 흙을 털고 티겁지를 골라 담는다. 뿌리가 굵어서인지 금방 바구니가 찼다. 그 새 봄이 무르익었나? 절기가 되기도 했지만 우리들 따스한 마음 때문이었을 거라는 생각.

머나먼 북극 나라에 한 임금이 살았다. 몹시도 추운 겨울, 추워 떨던 소녀가 하루는 궁궐 문 앞에서 잠자리를 부탁했다지. 그런데도 하인을 시켜 쫓아 버린 나쁜 임금님. 마을 사람들 역시 문을 꼭꼭 걸어 잠근 채 열어 주지 않았다. 지친 소녀는 밤새 숲속을 헤맸다. 그렇게 얼마 후 드디어 숲속 외딴 집을 찾았다. 친절한 주인은 난롯가에 데려갔지만 탈진한 채 숨을 거두고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다는데, 아침에 보니 세상이 온통 환해지고 무덤은 꽃으로 뒤덮였다.

내가 좋아하는 팝송‘사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의 가사 일부이다. 아르헨티나의 가수가 부른 것으로, 4월의 눈동자를 지닌 소녀가 봄을 선사했다는 북극나라 얘기다. 눈보라치는 겨울 밤 추워 떨던 소녀는 봄을 데불고 다니는 요정이었던 것. 눈동자 고운 소녀는 세상에 없지만 당신이 따스해서 봄이 왔다는 메시지가 봄 햇살처럼 느른하다. 다른 곳에는 초록병정이 진을 치고 푸르러져도 봄의 천사를 문전박대한 임금 때문에 언제까지고 봄이 되지 못했다. 봄에도 겨울보다 추울 수 있다. 겨울이지만 의외로 따스한 기억도 있다.

어느 해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밤중에 화장실을 가려고 나오는데 웬 허름한 아주머니가 추녀 끝에서 졸고 있다. 허술한 울타리를 뚫고 들어온 것 같다. 괘씸한 것은 둘째고 낯선 사람이라 두려웠지만 저대로 두면 얼어 죽지 않을까 그게 걱정이었다. 부랴부랴 깨워서 건넌방에 자리를 깔고 두툼한 오버를 걸쳐 주었다. 곯아떨어졌는지 기척이 없다.

얼마 후 아침이 되었는데 아버님이 지나가면서 보시고는 다짜고짜 불호령을 내렸다. 갑작스러운 사단에 허둥지둥 가 버린 아주머니가 지금도 불쌍하지만 아버님 말씀도 짜장 옳았다. 갓 시집온 새댁이 함부로 외부사람을 들인 건 누가 봐도 가당치 않다. 남편이 여행 중이었던 게 괜한 동정심으로 이어졌고 아버님은 그래 더욱 노발대발이셨다.

이후로 쫓기듯 달아난 아주머니가 생각나곤 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초점이 없는 눈을 보면 병색이 완연했건만 그렇게 나간 뒤로 더 악화되었을 것 같아 마음에 걸렸다. 아버님께 대한 원망보다는 추운 겨울 밤 어쩌다 우리 집까지 오게 되었는지 사연이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저대로 가면 보나마나 쓰러질 게 걱정이었는데 망이나 보듯 머물러 계시던 아버님. 마음 약한 내가 당신이 가고 나면 뒤미처 불러들일까 싶으셨던 게지. 야속하면서도 며느님인 나에 대한 염려인 줄 알기에 한편으로는 고맙기도 했던 추억 한 무더기다. 건강했어도 지금쯤은 하늘나라 사람이 되었을 그 아주머니, 동화 속 나라의 임금 또한 그렇게 쫓아내면서 봄은 영원히 가 버렸지만 본의 아니게 쫓아낸 나로서도 할 말은 없는데 겨울도 가끔은 그 때문에 따스해진다면서 열어보는 한 컷 슬라이드.

지난 겨울도 어지간히 추웠다. 두툼하게 입어도 귀 끝이 아리게 몰아치던 바람. 이따금 한파 주의보가 떨어지면서 노약자는 외출을 자제하라는 문자가 날아오곤 했으나 겨울에도 봄같이 따스한 날은 있다. 내 좋아하는 4월 요정의 전설과 낯선 아주머니가 봄으로 가는 터널에 얼비쳐 지나갔다.

그런 여자가 또 찾아온다면 나 자신 어떻게 나올지도 궁금하다. 혹 그 때처럼 집에 들인다 해도 약간은 망설일 것 같다. 관할 기관에 연락하는 등 신분은 확인하지 않는다 해도 한편으로는 조마조마하겠지. 절차를 따진다면 순수한 동정심일 수 없다. 누가 봐도 엉뚱한 일이었는데 물정에 어두웠던 나이라 가능했다.

동화 속의 임금 또한 그런 식으로 틈입하는 암살자를 경계한 것일 수 있기에. 오래 전의 나처럼 스무 살 서른 살 철부지였다면 얼어 죽기라도 할까 봐 두말 않고 재웠으련만 살얼음판 같은 상황이라 내칠 수밖에 없었다. 끝내 봄이 오지 않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으나 상황은 그려진다. 각박한 세상도 문제고 어른이 되면서 순수한 마음은 까맣게 멀어졌을 테니.

봄도 철부지다. 동장군이 진을 치고 있는데 불쑥 뛰어들질 않나 얼음판 대드는 봄바람도 범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다. 앞뒤 분간 없기는 꽃들도 마찬가지다. 추운 날인데도 턱하니 피는 복수초에, 강물도 풀리지 않은 초봄에도 헤벌쭉 웃어대는 개구쟁이 갯버들. 겨울이 철수할 때를 기다리자니 부지하세월이라 마구잡이로 나갔을 것이다.

가끔, 심술궂은 임금 때문에 겨울만 계속되는 눈의 나라가 떠오른다. 나쁜 임금 때문에 봄은 삭제되었으나 만년설과 오로라는 북극 마을 고유의 풍경이다. 북유럽의 전설로 만든 노랫말은 불쌍한 소녀를 난롯가에 들이던 외딴 집 주인을 떠오르게 한다. 그 밤을 못 넘기고 죽어버리자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기까지 했다. 봄인데도 추운 날씨는 봄 저고리 안섶에 남아 있는 겨울 느낌이지만 우리가 따스해서 봄이 올 거라는 상상은 눈 속에 파묻힌 봄꽃봉오리다. 사뭇 따스하다.

문득 봄볕이 노곤하다. 아직 꽃샘추위는 남았으나 봄에 대한 까탈이고 시비였을 뿐, 화단에는 새싹도 한 뼘이나 돋았다. 지금은 씀바귀를 캐러 나왔지만 쑥도 어우러질 터. 갓 자란 다북쑥을 뜯어 쑥버무리며 개떡을 쪄먹을 생각을 하니 정강이까지 봄물로 차오른다. 온통 꽃으로 뒤덮이고 나비가 찾아올 텐데 겨우내 새겨 둔 봄노래 때문일까. 봄인데도 일기가 분분할 때는 더 추운 나라를 생각하고 오로라를 상상한다.

북극의 임금은 어린 소녀 하나를 내치면서 봄에도 무엇 하나 자라지 않는 불행을 자초했고 또 한 사람은 임금도 포기한 봄을 일구었다. 나는 또 옛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문득문득 따스해지던 추억 한무더기다.

봄은 날씨 이전에 마음의 문제라고 할까. 나 자신 혹 찌든 마음으로 인해 더디게 올지언정 푸른 봄물 한 바가지는 길어 올리고 싶다. 아직 겨울잠을 자고 있는 누군가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면 봄은 곳곳에 넘쳐나겠지. 당신이 따뜻해서 봄이 오고 꽃이 피었을 거라는 누군가의 메시지처럼.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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