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니 눈뜨고 헤아리는 꿈도 많지만 자면서도 꿈을 꾸는 일이 많다. 오늘 새벽엔 초년 교사 시절 교무실 조회시간에 무슨 발언인가 진정성을 갖고 하니 윗분들이 아무 군말 없이 기꺼이 수긍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환히 웃던 꿈이 상쾌하였다. 이어서 뜬금없이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하던 중 ‘바람과 창문’을 영어로 묻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한 제자가 윈드(wind)하며 창문은 생각이 나지 않는지 머뭇거리는 것이다. 꿈에서 깨어나 생각하니 창문은 윈도우(window)! 그러고 보니 바람과 창문이 모두 윈드로 시작하는 것이다. 어원이 궁금할 정도로 신비로움에 잠겼다. 미상불 바람은 창문을 통해 들어가고 창문을 늘 바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 생각에 건물에 달린 창문을 살피며 걸어보았다.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에도 창문을 내야하고 그 창문을 자주 열어야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조급해온다. 다른 사람들의 따듯한 정과 고운 마음이 들어와 소통하려면 먼저 내 맘의 창을 열어야 하는데 나를 포함한 요즘 사람들이 쉽게 문을 열지 않는 정서가 팽배하여 발걸음이 무겁기도 하였다.

며칠 전인가 기차를 타고 단양 쪽을 다녀오다 갑자기 증평역에서 내렸다. 언젠가 가본 초정약수 세종 스파텔에 가서 물에 온 몸을 담그고 싶은 마음 간절하여 지인에게 이동을 부탁하기로 하였다. 평일인데도 온천을 즐기는 여인들이 있었다. 머리도 감지 말고 피곤해진 몸이나 담그려했는데 온천물에 씻고 보니 몸 이곳저곳이 개운치 않아 한 모녀가 있는 데로 조용히 다가갔다. 놓여있는 타월 좀 빌릴 수 있나 조심스레 여쭈니 흔쾌히 허락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대략 닦고 가서 어머님 등이라도 도와드리려 하니 오히려 내 등을 밀어준다며 따님이 밝게 웃는 것이다. 어머님도 막내딸의 인정이 흐뭇했던지 웃음 지며 거들어주신다

“비누칠까지 해드려라”

대중탕은 거의 다니지 않지만 온천탕에서도 이런 친절을 받아본 것은 꽤 오랜만이다. 거의 10년만이지 싶다. 초면에 이런 호의를 어찌 베풀 수 있는가? 나의 경우라도 좋지 않은 표정을 보이며 속으로 언짢아했을 텐데 그 고마운 마음에 피로가 깨끗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온탕 냉탕 녹차 탕 등 어디로 들어갈까 하다 코너에 자리한 황토 빛 탄산수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밝은 표정의 통통한 여인이 들어온다. 물이 전보다 맑고 따듯하다며 슬며시 어젯밤 꿈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이 멋지게 옷을 입고 얼굴도 곱게 분바르고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꿈에 보아서 신기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꿈일까요?”

“글쎄요? 역시 꿈은 꿈이지요. 전혀 생각지도 않은 것이 꿈에 보이니까요. 오늘 온천 오시어 피부도 곱고 얼굴도 어여쁘시니 그 꿈 값 인듯해요”

여인은 활짝 웃으며 좋아한다. 머리는 전날 감았기에 생략하려는데온천의 향기가 스몄는지 머릿속 이곳저곳 스멀스멀하여 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전혀 계획에 없던 온천을 갑자기 온 것이어서 헤어용 세제도 없으니 문제다. 조심스레 ‘혹시 샴푸’하며 말을 꺼내니

“네 저는 다 했어요. 이거 쓰시면 돼요”

한바닥만 받아도 감지덕지인데 통째로 건네주는 것이다. 정말 미안한 마음에 한번만 쓰고 샴푸 통을 돌려주고 싶은데 언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고마움과 아쉬운 헤어짐에 머리를 깔끔히 두 번이나 감고 샴푸 통을 깨끗이 씻어 보물처럼 가지고 나왔다. 지금도 욕실 한 구석에 잘 보관해두고 온천 갈 제 만난다면 돌려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마음의 창문을 연 이웃들 덕분에 온천을 잘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머리가 덜 말라 좀 추운듯해 목 주위를 더듬어 보았다. 그제사 불현 듯 머플러 생각이 났다. 기차 2호차 창가에 자리를 잡았는데 난방이 너무 더워 머플러를 창틀 옷걸이에 걸어둔 채 그냥 두고 내린 것이다. 새로 산 나비문양이 어여쁜 것이기에 여느 때라면 잃은 게 속이 상해 떠나간 기차를 원망도 하련만 ‘누가 필요한 사람이 가져다 잘 사용하겠지’ 하며 잃어버린 게 오히려 좋은 일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다. 오늘 내가 뜻밖에 받은 친절에서 비롯되었을까? 아마 온천에서 만난 여인들도 각자 베푼 사랑에 마음은 행복하고 점점 부자가 되는 신비한 경험을 소중히 할 것이다.

2월은 김수환 추기경님이 선종하신 달이다. 선종 10주기를 맞아 기념미사와 조폐공사에서 기념메달도 발행하였다. 몇 년 전 네비게이션도 없이 추기경 모신 용인공원묘원을 찾아가다가 날이 저물어 문 앞에서 참배도 못하고 돌아온 적이 있다. 그 후 몇 번 다녀왔지만 갈 때마다 깨달음을 안고 오게 된다. 스스로 바보라 하시며 일생을 하느님과 힘없는 사람들의 편이 되어주신 분! 선종과 동시에 두 사람에게 각막을 기증하여 앞 못 보는 이들에게 빛을 건네시고...... 새해 초부터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들을 만나고 내 가슴은 따듯해온다. 아니 그간 바람 불기만을 기다리고 창문을 열 줄 몰랐던 자신이 부끄러울 뿐이다. ‘쓰고 남는 것을 주는 게 아니라 소중한 것을 나누면 열매가 더 크게 맺힌다’고 일러주신 추기경의 말씀을 더욱 사모하게 된 2월이다.

 

박 종 순 / 시인. 전 복대초등학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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