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으로 가을이 서성인다. 둔덕의 갈대가 어찌나 예쁜지, 술 익는 마을이 있다면 그런 곳일까. 상강도 전에 가끔 서리가 내린다는 시월 스무날, 올가을도 하루 날 잡아 충주 가는 413번 버스에 올랐다. 오솔길에 접어든 버스가 노은 지나 중앙탑까지 가을을 태우고 달린다. 언덕만 나오면 털털거리는 버스이다. 잘 닦지도 않은 유리창 너머 풍경이 그림 같다.

멀리 길모퉁이 기와집은 이끼에 덮였다. 무너진 담장 사이로 늙은 호박이 예스럽다. 새둥지 같은 너새집과 잠깐만 걸어도 바짓단이 젖을 듯 가을 물살. 연분홍 구절초는 시들시들 마르고 참억새꽃이 날린다. 애옥살이 지친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산골마을 풍경이다. 초호화 별장도 많은데 대문 삐걱대는 낡은 집이 친근하다.

물 마른 냇가에는 징검다리까지다. 꺼멓게 말라붙은 개흙 사이로 바싹 마른 가시연밥이 고풍스럽다. 수정같이 맑은 물 가운데 박힌 돌섬까지 보였다. 마을 어귀 느티나무도 아름드리가 넘는다. 고샅길마다 감나무가 서 있다. 울먹이는 계절 뒤로 붉게 물든 가을이 함빡 달렸다. 길갓집 뒤란에는 콩단을 세워두었다. 한 두 개씩 튀어나가면 막대기로 털어내겠지. 기껏해야 서너 말 정도겠지만 메주를 쑤고 된장을 담가 먹을 정경이 곱다.

시골 버스다. 마을이란 마을은 빠짐없이 들어간다. 시간도 오래고 지루하다면 지루한 여행이다. 기껏 40km 남짓에 30분이면 충분한 거리다. 그런데도 1시간 빈은 족히 걸렸다. 다른 코스였다면 질려 버릴 터인데 딱히 볼 일도 없고 추색 짙은 풍경 때문이다.

불현듯 가을을 마름질하고 남은 자투리 풍경이 예쁘다. 산자락 돌아갈 때마다 드문드문 이어지던 늦가을 정물화. 동구 밖에서는 몇몇 개구쟁이가 알밤을 줍는다. 집집이 백일홍과 과꽃도 이슬에 젖어 새뜻하다. 꽃밭 모퉁이에는 봉숭아를 짓찧어 물들이던 흔적도 있겠지. 갈대밭 어름의 누군가는 또 낙엽을 쓸면서 떠나는 계절을 배웅한다. 가을을 끼고 가는 산책길로는 최고다.

불현듯 골안개처럼 새하얀 연기. 누군가 밭둑에서 쓰레기를 태운다. 아무 데서나 그러면 안 되지만 어스름 창가에 비치면서 밥 짓는 연기처럼 아늑하다. 언제든 가서 살고 싶은 마을이라 후덕한 느낌이었을 거다. 여태 보고 베낀 가을도 창가에 찍힌 슬라이드였으니까.

가을이 뒹구는 오솔길에 낙엽이 수북하다. 가을비라도 뿌리면 죄다 수장되겠지만 가랑잎 쌓인 풍경은 거기밖에 없다. 이따금 보이는 식당 또한 자기 집을 개조해서 만들거나 콘테이너 박스가 전부다. 간판에 내건 메뉴도 흙내 물씬 나는 청국장에 순두부찌개다. 뜨락을 보니 몇 마리 씨암탉이 맨땅을 버르집는다. 냇가에서 텀벙대는 오리도 분주해 보인다. 그 녀석들이 낳은 오리알과 달걀도 손님상에 오를 것 같다.

집집이 텃밭에는 팔뚝만한 무가 뚝심이나 부리듯 박혔다. 자줏빛 갓도 예닐곱 모숨 보인다. 짚으로 묶인 통배추 역시 고랭지 채소처럼 산골짜기 밭둑에서 자란다. 노은이니 동막골 옷닭밭골 같은 고을 명칭도 특별하다. 노을이 예쁜 동리라서 노은일 거라고 상상해 본다. 산골 마을일수록 그런 이름이 흔했다. 조금 더 가니 달빛 고운 월정리가 있고 초승달까지 나와 서성인다. 잠깐 지날 동안도 토속적인 이름 치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이름 예쁜 동네가 또 얼마나 많을는지.

둔덕에서 수 천 수 만 장 금돈을 쏟아내는 은행나무도 두 아름은 실하다. 천연의 노란 빛깔 카펫은 늦가을의 최고 서정이다. 오지마을이기 전에 수 백 년 내려온 마을이었던 것. 버스에 오르는 사람들도 대부분 늙수그레한 할머니 할아버지다. 정차를 했는데도 저만치서 한참씩 걸어온다. 버스비를 낼 때도 허리춤 뒤지느라 분주스럽다. 묵묵히 기다려주는 운전기사도 사람 참 좋아 보인다. 도심 한복판에서는 성깔이 나올 계제건만 운전이라도 마음은 푼푼해지는 성 싶다.

늦가을이면 습관적으로 다녀오는 코스다. 된바람에 손이 옥말려들고 어깨가 시릴 즈음이면 지난 해 가을이 생각났다. 늦가을 일기를 펼치다가 떠오른 만추의 서정. 오늘 마침 날을 잡았다. 낙엽 질 때는 서리거둠 분주한 상강이었지. 셔터를 눌러대면서 사진을 찍는 것처럼 달리는 대로 인화된 들판의 기록이다. 스케치북만한 창가에서 그림일기 쓰듯 빽빽하게 적어 둔 일기장을 보며 가을이 떠나기 전에 서둘러 나온 길인데.

구메구메 농사짓는 사람들도 갈무리에 급급하련만 자분자분 정겹다. 기슭의 물새 또한 고즈넉하고 청옥같은 하늘은 당장에라도 서리를 뿌릴 기세다. 누군가는 서리태와 청둥호박을 함지 가득 실어 가고 호박 수내기를 따 담느라 하동대는 모습도 간간 찍혔다. 박박 씻어서 콩가루 듬뿍 묻혀 내 좋아하는 호박수내기 된장국을 끓일 것 같은 상상이 무척 설렌다.

보니 아래뜸 풍경도 따사롭다. 더도 덜도 말고 늦가을처럼만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늦가을의 잿빛 풍경도 예쁘다면 남은 삶도 충분히 아름다울 거라는 혜윰. 골막하니 차 있던 황금들판은 텅 비었으나 뒤미처 서설이 내리겠지. 길섶에 떨어지는 단풍도 그 전신은 초록이다. 풍경은 아득아득 지워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산동네. 어둠이야 달이 뜨고 초저녁별 나오면서 걷힌다. 그래서 지나온 계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애틋할 수밖에 없다.

바람이 차다. 쌀랑한 날씨는 겨울이 다가올 수순이되 불안한 기색은 없다. 내일이라도 서리가 내리면 단박에 결딴날 텐데, 여전히 차분한 풍경들. 서리맞은 모습은 유감이지만 사단이 나야 내년에도 풍경이 곱다. 내 좋아하는 늦가을 역시 그렇게 떠날 준비를 해 왔는지 몰라. 군데군데 쌓인 낙엽도 그렇고 거미줄은 또 들바람같이 얽혀 있었으므로.

돌아가면 지금 이 느낌을 그대로 받아 적고 싶다. 물 마른 자드락길이 가랑잎을 파묻었다고. 지난 가을이 적혀 있던 일기장에 만추의 서정을 끼워두는데 철새들 깃 하나 떨어진다. 혹 내년에도 오게 되면 지금 풍경이 새록새록 떠오르겠지. 눈감아도 연연한 풍경이 오래 전 기억마냥 어린다. 해독하기 힘든 메시지나 되는 것처럼. 마지막 떠나는 풍경을 놓칠세라 낱낱 베껴온 나처럼.

 

이정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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