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이 진다. 도서관에서 나오자마자 그린 듯 밀려오는 꼭두서니 빛 해일. 풀밭에서는 찌르찌르 귀뚜라미 울고 해거름 번지는 노을이 꿈결처럼 곱다. 날마다 지는 태양이건만 오늘 따라 왜 그렇게 울먹이는지. 하늘도 저녁이면 지는 하루가 아쉬운 듯 불가마 걸어놓고 내일을 지핀다. 어스름에서 초저녁 별 뜰 때까지 눈물짓는 서쪽하늘 거기서.

노을을 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좋아하는 명상곡을 기가 막히게 잘 켜는 바이올리니스트이다. 다양한 빛깔의 저녁노을처럼 그 소리도 진홍물처럼 번져나갔다. 현을 잡는 내내 느껴 우는 듯하더니 말미에서는 장중하다. 멜로디가 흐를 동안 표정도 바뀐다. 해거름이면 서쪽하늘 달려가 눈물 쏟는 또 다른 한사람이었다는 생각에 나까지도 뭉클해온다.

특별히 바이올린을 잘 켜는 것 외 아는 건 없다. 우연히 도서관의 한 영상물에서 공연실황을 보게 되었다. 천진한 인상이되 악기를 잡는 순간 드물게 음전하다. 고요한 선율일 때는 표정도 가라앉고 어디쯤 슬픈 가락일 때는 잔잔누비 선율에 손마디까지 떨린다. 눈물이 배어나올 듯하다. 손으로도 켜지만 마음으로도 켠다.

문득 주위가 어렴풋하다. 얼마쯤 걸어 청미천 기슭에 이르렀다. 저만치서 노을이 강물을 끓인다. 해거름 풍경이 고스란히 담겼다. 노을은, 오늘 하루의 모든 것을 태우고 강물은 다독다독 재운다. 즐거웠든 속상했든 오늘은 영원히 물속에 수장된다. 무한정 깊은 슬픔인데 뒤따라 어둠을 비집고 나오는 내일.

저기 붉은 하늘은 빛이 빛을 산란하고 잇따라 또 다른 빛의 산란이다. 바이올리니스트 또한 구슬픈 여운이 손끝으로 전이되었을 테지. 조목조목 짚어가는 4개의 현도 서로가 빛깔 다른 슬픔이었기에. 노을은 파장이 짧은 푸른빛은 흩어지고 파장이 긴 붉은 빛깔만 남은 현상이다. 수줍은 듯 꼭두서니 빛이었다가 보랏빛도 살짝 어렸다. 저녁이면 지평선 가라앉는 슬픔 때문에 더 절절했던 것일까.

누군가 바이올린을 켠다. 이제 막 물드는 가을에 샛강이 흐른다. 기슭으로는 윤슬이 찰싹이고 억새는 덩달아 슬프다. 강물은 또 지는 해를 그러안는데 현이 울릴 때마다 지그시 눈감은 채 명상에 잠겨 있다. 명상곡 이미지가 고조에 달해 속울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지 어느 순간 줄이라도 끊어낼 듯 깊은 파열음이다.

허나 그 뿐, 속으로만 삭히는 아픔이 웅숭깊다. 펑펑 울음을 쏟아낼 듯했는데 그래서는 아름다운 노래가 되지 못했다. 참다 참다 마지막 구슬프게 올라가던 소리가 모든 슬픔을 재우고는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하지만 기도라도 올리는지 손을 떼지 못한다. 세상 모든 슬픔을 껴안은 것 같던 표정이 간 데 없다.

오직 바이올린과 활 잡는 손가락에 집중한다. 그래서 곡에 따라 뉘앙스가 그리 다양했던 것일까. 명랑한 곡이든 장엄한 곡이든 연주할 때마다 알맞추 바뀌지만 나로서는 명상곡을 연주할 때의 표정이 가장 좋았다. 노을을 닮았다는 뭐 그런 느낌이었던 것. 삶의 진실이었든 예술에의 집착이든 무아의 경지에 들어선다면 참 아름다울 텐데 싶어 마음이 짠하다.

노을만 뜨면 까닭 모르게 슬퍼지던 때가 있었다. 괜히 눈물이 나고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외로움이었다. 울어도 눈물 한 방울 내비치지 않는 노을의 슬픔까지 담아서. 얼마 후 하루가 끝나고 고요해지면 그제야 황망히 돌아섰다. 노을이 지기 전까지는 몰랐다가 급자기 저녁바람에 으스스 떨던 기억이 선하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던 바이올리니스트처럼 그 때의 노을 역시 멀어지는 오늘이 아쉬워 그리 타올랐었나 보다.

그녀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노을을 좋아했을 것 같다. 어느 날 해가 설핏 가라앉고 깜깜해질 때까지 바라보았을 정경이 엇갈린다. 그래 지금 저토록 아름다운 선율을 쏟아내는 것이리라. 현을 켤 때마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눈물겨운 명상곡을 연주하게 되었을 테지. 노을을 싫어할 사람이 있을까마는 악기를 다루자니 감수성이 남다를 테고 자연스럽게 좋아할 거라는 생각이 든 거다.

이따금 환상의 연주 끝에 막을 내린 명상곡이 노을에 겹쳐 보인다. 마지막 줄을 놓을 때까지 눈 감고 있더니 혹 어린 시절에 본 노을을 회상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노을을 보기 직전 명상곡을 들은 것부터가 우연은 아니었다. 타이스의 명상곡은 언제 들어도 가을처럼 서늘한 느낌이고, 바이올린 역시 해껏 타오르는 놀빛 이미지였으니까. 누군가 억새밭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것 같은 환상이 지나간 것도 그 때문이리라. 영상으로 본 달리 연주회장 분위기도 고즈넉했지만 강변의 즉흥적인 무대는 고풍스럽다.

눈부신 조명과 관객에 둘러싸인 것과는 달리 천연 무대 조명은 서쪽하늘 번진 주홍빛 여울이다. 아름다운 선율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또 강변의 억새들 무리다. 가으내 바람을 채우고는 무거운 듯 일제히 숙이고 있다. 저녁하늘 비끼며 날아가던 물새들까지 기슭의 돌무더기에 내려앉는다. 날개를 접은 채 잠잠하다. 꿈같은 선율을 감상하는 기색들이다. 연주회장의 환호성과는 달리 바위같은 침묵으로 느낌을 대신한다. 슬픔에 짓눌린 가슴을 살포시 열어 보이던 노을처럼 쟁여 둔 그리움까지도 참고 참으면서 아름답게 승화시킨다.

노을빛 닮은 사람이고 싶다. 슬픔이라 해도 아주 조금만 내비치는 사람이면 좋겠다. 노을은 서쪽하늘 차오르다가 썰물로 지는 조석간만의 현상이다. 설핏 기울여 쏟으면 온 하늘이 물들 텐데 서쪽하늘만 일부 쏟아졌다. 빙산의 일각이라 하듯 서쪽하늘 언저리 눈물도 극히 일부다. 연연히 타오르다가도 불시에 스러진다. 노을이 뜨는 한 힘들어도 참아야 할 이유가 생겼다.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 슬프고 아름다운 노을과 바이올린 때문에 친근해진 폭이다.

바람이 지나간다. 해거름 땅그늘도 저만치 비낀다. 어스름한 저녁 뒤미처 뜨는 사금파리 별. 불시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졌건만 영원히 사라질 노을 속의 하루가 손끝에서 허물어진 모래성처럼 아쉽다. 누군가 설핏 기울이면 온 하늘이 물들 텐데 서쪽하늘 언저리만 쏟아졌다. 빙산의 일각이라 하듯 서쪽하늘 눈물도 극히 일부다. 자꾸만 꺼뜨리려는 눈물 때문에 강물을 끓이지 않을 노을도 없고, 지켜보는 눈동자 때문에 산란을 멈출 수도 없는 그 속내.

그래도 노을을 보니 행복하다. 아주 에쁜 하늘도 그렇고 좋아하는 선율을 들은 끝이다. 환상적인 연주자 때문에 더욱 특별한 날이다. 노을이, 제가 저를 태우는 것은 슬프지만 내일을 위해서 지는 거라면 행복하다. 여명의 일출도 예쁘지만 해거름 낙조도 아름답다. 일부는 태우고 한편에서는 울먹이는데 다음날이면 여전히 떠오른다. 빛의 산란이다. 산울림 메아리가 이중삼중 여운을 남기면서 더욱 환상적이듯 끝없는 빛의 산란이 서쪽하늘 어름에 금물결로 흐른다. 내일을 슬어놓는 노을 때문에 참 아름다운 하루다.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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