푹푹 찌는 날씨, 몸이 녹더라도 집 안에 있기보다 바깥바람을 쐬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마땅히 갈 곳이 없을 때는 자동차도 좋은 피서지 중 하나, 에어컨을 쐬며 가까운 근교라도 다녀오면 무더위를 이길 수 있을까 싶어 집을 나선다.

시내에서 외곽으로 나가면 청주가 자랑하는 가로수길이 있다. 길가에 자리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강렬한 햇빛을 막고 도로 위에 그늘을 만들었다. 차 바깥으로 펼쳐진 눈부신 녹음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더위가 한층 가신다.

조금 더 차를 몰고 조치원이나 세종을 가볼까 고민하던 차에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문득 국사시간에 송상현이라는 인물에 대해 배웠던 기억이 난다. 임진왜란 초기에 부산에서 순국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이 어째서 이곳 내륙인 청주에 있는걸까, 호기심을 안고 찾아간다.

가로수길을 지나다 보면 만날 수 있는 동래부사 송상현 충렬사는 청주시 흥덕구 수의동에 있다.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곳으로 송상현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기념관이 있으며 가까운 곳에 묘소도 있다.

본래 송상현 선생은 문과 급제 후 선조 24년에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던 문관이다.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군이 1차 목표지로 삼았던 동래성에 육박한다. 동래성을 포위한 왜적이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고 하자, 송상현은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라고 쓴 나무판을 적진에 던진다. 이후 장렬히 항전하다 전사한다.

그렇다면 왜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던 송상현 선생이 전투를 지휘했던 것일까? 당시의 조선은 당파 싸움과 200년간 지속된 평화로 전쟁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평화가 지속되다보니 장수들 중에 겁쟁이와 무능력자가 많았다고 한다.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이각도 그 중 하나로 적의 엄청난 규모에 달아난다.(후에 도원수 김명원에 의해 참형을 당한다)

이에 반해 비록 문관이지만 송상현은 군사와 백성들과 힘을 모아 항전하기로 결심하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올리며 부친에게 혈서를 쓴다. “군신의 의리는 무겁고 부자의 은혜는 가볍다고 합니다”라는 말이다. 단순히 왕과 신하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끝내 의연한 모습으로 왜군에게 피살된 동래부사 송상현, 그런 송상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선조는 전국의 명당을 찾던 중에 아무 연고가 없던 청주로 묘를 이장한다. 이후 광해군 때 사당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의병과 백성들의 희생으로 이 땅에 평화가 있었음을 기억한다. 이제 남은 것은 후손인 우리의 몫이다. 늘 역사를 통해 배우고 대비하는 마음가짐으로 순국선열에게 부끄럽지 않은 후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기 수 / 충북 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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