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 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부드럽지만 카리스마가 뚝뚝 떨어지는 여가수의 목소리가 핸드폰에서 울려 퍼졌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던졌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화면 위로 떠올랐다. 받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과 “아닌데요. 잘못 거셨어요.”라고 실랑이 하는 것이 싫었다. 전화를 안 받자 이번엔 문자가 왔다. 문자는 음성으로 나누는 대화가 아니니 부담이 덜했다. 문자를 열였다. “희숙아 나 경면이야. 새벽 비행기로 떠나. 일곱 시에는 공항 가는 버스를 타야해.”라는 활자가 화면 위로 가득 올라왔고 나는 동공을 확장시켰다.

뜻밖에 떠오른 문자에 나는 둔기로 얻어맞은 듯 잠시 멍을 때렸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수습하자니 화가 치밀었다. 핸드폰을 들어 문자가 날아온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야~ 너 뭐야? 언제 왔어? 왜 이제 연락해?”라고 대뜸 소리를 쳤다. 그녀는 미안한 듯 말을 더듬었다. “계속 전화했는데 안 받더라.”나는 애써 화를 누르며 말했다.“이거 네가 사용하던 전화번호 아니잖아?” “응 한국에 와서 잠깐 쓰는 번호야.”그녀가 답했다. 나는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어디야?” 그녀가 수화기 너머에서 차분한 목소리를 보내왔다.“사창사거리. 너 어디 근무하니? 택시타고 갈게.” 나는 말했다. “빨리 와 밥 먹자!”

오년만이다. 오년 전 나는 그녀가 있는 필리핀에 갔었다. 그녀는 오지 마을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까만 피부의 낯선 아이들에게 학용품을 나눠주고 연고를 나눠주고, 아이들의 부모들에게는 생필품도 나눠 주었다.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그 더운 곳에서 꽃 같은 젊음을 불사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따라 다니며 오지 마을 사람들을 만났고 힘든 그들의 삶에 잠시 섞여들었다. 학창시절 대학생 선교 단체에서 활동을 하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전도사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필리핀으로 선교를 하러 간다며 떠났다. 종교가 없는 나는 그런 그녀의 고운 마음이 좋아서 매달 후원금은 보냈다. 그리고 가끔 오지에서 필요한 물건들을 보내주곤 했다.

오년 전 찌는 여름, 그녀를 보기위해 필리핀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녀는 말로만 듣던 더운 타국에 치안도 불안정한 그곳에서 헌신하고 있었다. 그녀를 본 순간 가슴에 싸한 전류가 흐르는 듯 했다. 보름을 그녀를 따라 오지를 헤매면서 여러 갈래 생각의 숲을 헤맸었다. 그녀를 두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도 내내 그녀의 모습이 나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초조하게 그녀를 기다리며 지난날의 뒷모습을 더듬고 있는데, 그녀가 저만치 웃으며 걸어왔다. 코스모스처럼 하늘거리던 그녀가 어느덧 둥글둥글한 중년의 여인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대학 때 자주 갔던 곱창 집을 찾았다. 그녀와 나는 식성이 비슷했다. 술도 못하면서 곱창 닭발, 닭 내장 등 술 안주로 적합한 음식을 즐겼다. 어느 날은 그녀를 꼬드겨 수업을 빼먹은 채 곱창 집에 가서 곱창을 실컷 먹었다. 그 날 우리는 배탈이 나서 밤새 자취방 화장실을 들락거렸었다. 다음날 희멀건 얼굴로 ‘샬롬’하며 인사하는 그녀에게 나는‘죽을 놈’이라고 대답 했다. 수업을 안가서 벌을 받은 것 같다며 기도하러 교회에 가자는 그녀에게 “너나 회개하고 하나님 잘 믿어라. 나는 나도 안 믿어. 난 보이지 않는 것은 안 믿어. 가끔은 보이는 것도 안 믿어.”라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의 나는 참 철이 없었고 그녀는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 착하고 성실했다. 우린 그날을 이야기하며 웃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왔냐고 묻자 그녀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아파서 왔어. 검사를 했는데 이상이 없다네. 난 너무 아픈데 말야.” 그러고 보니 그녀의 몸은 술빵처럼 부풀어 있었다. 내 마음 속이 미세한 실금이 가는 듯했다. 저녁을 먹고 약국에 갔다. 오지에서 필요한 연고를 샀다. 그리고 문구사에 들러 연필, 공책, 스티커, 볼펜, 등을 골라주었다. 그녀는 고맙다며 아이들이 무척 좋아 할거라 했다. 그녀는 오지 마을에 봉사를 가는 것 말고도 집에 다섯 명의 필리핀 대학생들을 돌보며 살고있다. 오년 전 내가 사주고 간 밥솥에 밥을 지어 먹는 필리핀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내 생각에 젖는다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녀를 터미널에 내려주었다. 공항리무진을 타기위해 어둠속으로 털털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대견하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안스럽기도 하고 수 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켜 무겁게 나를 짖눌렀다. 노랫말 가사처럼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녀는 영원히 내 가슴 속에 유난히 크게 반짝이는 별이다. 내가 사는 동안 수많은 생각의 강줄기를 만나게 해주는 나룻배 같은 존재다. 그녀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나의 나룻배가 세상의 강을 무사히 건너길 진심을 다해 손을 모아본다.

 

김 희 숙 / 수필가,원봉초등학교병설유치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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