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국립, 사립으로 교육기관이 나뉜 것처럼 과거 조선시대에도 국립․사립의 교육기관이 있었다. 국립은 성균관, 향교 등이 있었는데 먼저 ‘성균관’은 최고의 국립 학부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성균관’이라는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 충렬왕이다. 당시의 최고의 교육기관은 국자감이었으나 이를 성균이라는 말로 바꾼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성균관이라는 명칭은 존속되었으며 개국 초 150명이었던 정원이 세종대왕 대에 이르러 200명으로 정착된다.
유생의 특전은 기숙생활을 하는 중에 국가로부터 학전과 노비 등을 제공 받았다는 것이다.

성균관의 하급기관 중에는 ‘향교’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지방교육기관인 향교는 90명에서 30명까지의 학생을 수용했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건국이념이 유교였으며 과거제도를 운영했기 때문에 성균관과 향교는 각각 도성과 지방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일종의 등용문이었던 셈이다.

국립기관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조선 중기, ‘서원’이라는 사립교육이 생겨났다. 지역에 연고가 있는 선비를 추모하는 사우(祠宇)를 세우고, 또한 재(齋)와 강당을 지어 학생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이처럼 사(祠)와 재(齋)가 갖추어 있는 곳을 서원이라고 불렀다.

서원 중에서도 임금이 사액한 서원은 나라에서 교육생의 학비를 보조하고 노비와 책, 토지를 주었다. 성균관이 하부 교육기관으로서 존재했다. 그러나 본래 유학을 장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워진 서원은 해가 갈수록 문제가 심각해진다. 유생들이 곳곳에 서원을 지으면서 600개가 넘는 서원이 전국에 세워졌고 각 서원을 중심으로 당쟁을 일삼으며 양민을 못살게 하는 폐단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에 고종 1년 흥선대원군은 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이것이 바로 ‘서원 철폐령’이다. 전국에 47개의 서원만 남기고 대부분의 서원을 정리한 것이다.

과거 조정에서는 서원의 폐단을 문제 삼아 정비를 시도했던 적이 있었으나 유생들의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한다. 허나 대원군이 섭정을 시작하고 서원에 대한 모든 특혜를 철폐하고 적극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며 많은 수의 서원이 사라졌다.

우리 충청북도에는 충렬사, 표충사가 남게 된다. 그 중에서도 충주시 단월동에 있는 충렬사는 조선 인조 때의 명장 임경업 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임경업 장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숙종 23년에 사당을 세웠다.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와 고문으로 목숨을 잃게된 장군의 절의를 기리는 곳으로 장군의 영정과 유품, 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 등이 있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충렬사를 찾아가보자. 나라를 위해 끝까지 절개와 굳은 의지로 살다간 임경업 장군과 지금의 대한민국을 지켜낸 호국영령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 기 수 / 충북SNS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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