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드락 길섶에 찔레꽃이 피었다. 다람쥐 한 마리가 금방이라도 뛰쳐나올 걸 같은 산비알에서 숨이 넘어갈 듯 아슬아슬하게 핀 꽃 너울이 산그림자 지는 언덕에서 그림이나 보듯 예쁘다. 평지도 아닌 비탈이고 꽃이라야 수수하니 흰 빛깔인데 투명한 5월의 하늘 때문인지 모르겠다. 초여름 피는 꽃은 어쩐지 수더분해 보인다는 그런 느낌이라고나 할지.

가령 지금 끝물로 피는 아카시아만 봐도 담백한 뉘앙스다. 어릴 적, 느티나무 골 과수원을 지나 강줄기 끼고 돌 때마다 하얗게 떠오르던 아카시아 울타리. 가지가 휘도록 핀 송아리를 보면 면사포를 쓴 5월의 신부처럼 곱다. 눈부신 환상 속에 갈래 머리 층층 땋아 내린 여고생이 겹쳐 지나갔다. 예쁜 시집 하나 낀 채 언덕에 앉아 찰박이는 윤슬을 바라보곤 했었지. 계절의 밑단을 공그르는 초여름, 바람이 불기라도 하면 꿈결처럼 다가오던 하얀 꽃노을.

뒤미처 만발하던 애기똥풀 꽃이 생각난다. 보면 볼수록 애기 똥 색깔이다. 푸른 숲 모퉁이마다 노랗게 바이어스 처리를 한 것 같았다. 초여름 신록은 연두색이고 그것은 초록에 노란색을 버무린 빛깔이다. 봄도 말미에 접어들면서 철쭉과 아카시아만 후렴으로 필 뿐 웬만한 꽃은 다 떨어졌는데 산자락 다님길에 오밀조밀 모여 있는 싸리꽃이 초여름 하늘에 꿈결처럼 고왔다. 좀 더 거슬러 가서 초봄에 꽃이 필 때는 약속이나 한 듯 어수선한 날씨였는데.

봄의 전초기지였던 3월의 풍경이 여전 그랬다. 얼음 속에 핀 복수초와 변산바람 꽃은 겨울을 깨고 나온 계절 3월과 엇비슷하게 강해 보였다. 봄꽃이 뜻밖에 왈가닥 기질이 많은 것도 겨울보다 강해야 필 수 있는 환경적 배경 때문이다. 산수유 생강나무 꽃도 보면 춘설에 꽃샘에 쫓기듯 하동지동 피었다. 한편에서는 악천후 속에서 기를 쓰고 피우는데 한편에서는 심술을 놓는다. 그러다 보니 늘 철부지 어린애처럼 떼를 쓰면서 피어야 했던 봄. 하지만 남아 있는 겨울의 후속부대 역시 걸핏하면 발목을 걸었다. 가끔은 보는 사람까지도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3월에 피는 꽃의 그런 특징이야말로 보기보다 억척스러운 봄 기질을 닮았다. 까칠한 밭둑에는 생강나무와 산수유 꽃이 피지만 춘설에 꽃샘에 놀라는 게 다반사다. 그렇게 마음 놓고 완상했던 기억이 없는데 뒤미처 4월의 꽃은 약간 다르다. 꽃샘추위를 따돌린 벚꽃은 누가 봐도 고왔다. 연연한 꽃그림자가 냇물에 담길 때는 봄 풍경의 백미다. 그러다가 영하로 떨어지면서 된통 홍역을 치르곤 하지만 그래서 열기가 가라앉는다. 수수하게 피는 배꽃 사과꽃은 덜한데 빨긋빨긋 철쭉은 온통 두드러기다. 잇따라 피는 복숭아꽃은 알레르기에 다래끼까지 겹쳤다.

자세히 보면 눈앞이 온통 붉은 꽃 여울에 덮이곤 하는데 한편에서는 긁느라 법석이고 일부에서는 고름이나 짜듯 분주스럽다. 봄꽃이 필 때는 그래서 가끔 터진다고들 표현하는 건 아닌지. 특별히 벚꽃과 진달래 등이 떨어질 때는 색이 짙은 만큼 유난히 잘 띄었다. 꽃이야 열흘 붉을 수는 없기에 당연했으나 꽃무덤같이 난분분할 때는 나도 모르게 철렁해진다. 안 그래도 꽃샘에 보리누름 추위에 시달리면서 잠깐 잠깐 피는데 어수선한 일기 때문에 더더욱 동동거린다. 하필 그럴 때 피는 운명도 어쩔 수 없구나 싶다. 눈이 환할 정도로 만발했던 것이 지면서 약간 부담스러웠으나 1차 혹독한 과정을 치른 탓에 그 다음 후속으로 피는 꽃이 훨씬 더 여유로웠을 테지.

꽃들의 세계를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최근에 피는 오월의 꽃이 종잇장보다 얇은 것을 보고 난 뒤의 추측이다. 봄꽃이든 초여름 꽃이든 지는 거야 똑같이 아쉽지만 찔레꽃이 혹 무더기로 진다 해도 봄꽃을 볼 때처럼 철렁 내려앉는 기분은 아니다. 이따금 아카시아가 와르르 떨어질 때는 수많은 눈송이가 날리는 것처럼 혹은 눈사태를 보는 듯했으나 수수한 빛깔은 팔랑팔랑 수많은 나비떼를 보듯 차라리 경쾌한 느낌이었다. 봄꽃처럼 무더기무더기 피는 것까지는 같은데 빛깔이 투명해서 일시에 떨어져도 그답지는 않았던 것.

지금 보는 찔레꽃 역시 탐스럽게 핀 것 치고는 수수하니 흰 빛깔이다. 가시는 있어도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순을 따먹었다. 싸리꽃 역시 단순한 중에도 깨끗하다. 산자락 둔덕에 조촐하니 핀 꽃을 보면 자그마한 잎에 종잇장 같아서 질 때 역시 하르르 날리는 정도로 끝난다. 투명한 햇살이라 꽃잎까지도 얄팍하게 새긴다. 피었다 하면 꽃샘과 잎샘에 시달리는 삼사월 꽃보다 훨씬 느긋하고 뒤끝이 깔끔했다. 할미새니 꾀꼬리 등 날아가는 새들 또한 꽃처럼 귀엽고 신록만치나 투명했다. 어쩌다 뒤뜰에서 울어대는 초여름 새 노래를 들으면 싱그러운 소리가 수많은 음표로 떠올라 동글동글 뽀얀 진주가 허공으로 수없이 아로새겨질 것 같다.

예쁘면서도 약간은 노골적인 4월의 꽃들과 비교해 본다. 가령 진달래의 예명인 두견화에 날아드는 두견새만 봐도 꽃이 떨어질 때는 피를 토하듯 울어쌓는다는 게 시적이나 달리 보면 무척이나 절박한 표현이다. 꽃이 진다는 것은 물기가 없이 시득시득 마른다는 뜻이고 연연한 진달래는 더더욱 짙은 꽃분홍으로 바뀌고 떨어진 뒤에는 더더욱 강렬한 빛깔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 토하듯 운다고 하는 비약으로까지 가는 게 아닌지.

어쩌면 그래서 풍경과 썩 어울렸을지 모른다. 봄이라 해도 언제 날벼락을 맞을지 춘설에 시달릴지 항상 동동거렸다. 열흘도 짧은데 꽃샘에 춘설까지 된통 만나면 그 전에 경을 치를 테니 비상시국에 있는 듯 긴장하고 열에 아홉은 그렇게 지는 꽃들이라 새들조차도 분위기를 파악했을까. 5월의 새들이 약속이나 한 듯 귀엽고 상큼한 것은 갓 세수한 것 같은 초여름 배경 때문이다. 꽃이라면 대략 붉은 계열이고 분홍색 정도는 되어야 했으나 5월의 하늘은 솜털 보송한 소녀의 얼굴 같고 연초록 물이 배어나올 듯 앳되다. 꽃들이며 새도 계절에 걸맞게 청순했다는 의미. 풍경은 담백한데 거기 깃든 이미지가 화려할 경우 오히려 겉돌 수 있기에.

그나마 5월하고도 스무날이 지났다. 왁자하게 피던 벚꽃과 진달래는 죄다 져 버리고 아카시아만 후렴으로 피는 봄 끝자락 끝물이다. 이제 그들 꽃도 지고 나면 금방 여름이고 그에 맞춰 새들은 푸른 하늘 오르내리며 하루하루 푸르러지는 신록을 노래하겠지. 기껏 심은 가지와 고추가 얼기도 하는 보리누름추위도 걱정이나 여태 괜찮은 걸 보면 삼월, 사월의 새들보다는 느긋할 수 있겠다. 가령 잎도 없이 꽃만 잔뜩 핀 가지에서 울다가 비바람에 떨곤 했단 것과는 달리 지금 이 초여름 새들은 우거진 나뭇가지에서 갑자기 쉬리바람에도 깔축없이 불렀을 테니 싱그럽고 해맑은 분위기 그대로다.

진달래와 철쭉의 강렬한 빛깔에 맞춰 거기 우는 새도 피처럼 붉은 울음을 토했던 것과는 달리 5월의 꽃은 하나같이 수더분해서 오히려 동떨어진다. 뭐니뭐니 해도 계절 또한 나이가 있다는 생각. 벚꽃이니 살구꽃이 와짝 지고 난 자리에는 그 새 버찌와 살구가 디래다래 열렸으니 지는 꽃은 허우룩해도 그래야 열매를 맺고 달게 익는다. 꽃샘 잎샘 언덕에서 발원된 꽃가람이 어느 새 중류에 접어든 지금 왜 그런지 신록만 고집할 수 없을 것 같다. 한번 가면 그만인 우리와는 달리 해마다 돌아오는 계절의 나이테를 보며 나는 또 한 해의 연륜을 새긴다. 촉촉하니 봄물 든 초여름 페이지를 넘기면서……

이 정 희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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