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용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청소년들은 아마도 가수 빅뱅의 리더 ‘지드래곤(권지용)’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30대 중반에 접어든 내게 더 친근한 지용이라는 이름은 다름 아닌 ‘정지용 시인’이다.

정지용 시인은 한국 현대시의 선구자이자 우리 민족의 정서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참신한 이미지와 절제된 시어로 서구모더니즘을 한국적으로 승화시킨 시인이라는 평을 듣는 한국의 대표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 「향수」 는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 가장 많이 외우고 있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국민애송시, 시인들이 즐겨 암송하는 애송시로도 늘 순위권에 있다.

정지용시인은 1902년 충북 옥천 하계리에서 태어났는데 태몽 또한 시인의 면모처럼 비범하였다. 태몽에서는 연못의 용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후 지은 이름이 ‘지용’인 이유가 태몽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910년 현 죽향초등학교인 옥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고 17살의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집안사정이 어려웠음에도 학교성적은 늘 우수했다고 한다.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고 교내 시위를 주동하다 무기정학을 받고 이후 간신히 구명활동으로 풀려난 이후 입학 5년만인 1922년 휘문고보를 졸업하게 된다.

활발한 작품활동을 벌이던 시인은 해방 이후 비교적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이화여자대학교의 교단에 서게 된다. 시인은 한국어와 라틴어의 강의를 맡았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사임하고 서울에 은거한다.

이 기 수 / 충북SNS서포터즈

정지용 시인의 삶과 시에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가 녹아있다. 지금은 많은 오해가 풀렸지만 80년대만 해도 시인의 이름을 찾기란 무척 어려웠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시 정지용 시인은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는데 이후 자진 월북을 했다라는 설과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명확히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월북문인 금지 조치가 이루어진 탓이다.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이다. 해금조치 이후 그 해 4월 1일 이 땅의 시인, 문학인, 제자들이 모여 지용회를 발족하였으며 5월부터 제 1회 지용제가 열리며 지금의 문학축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해금 조치 이전까지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불온시인 취급을 받았지만 한국적 감수성을 잘 드러낸 시인의 작품이 비로소 세상에 선을 볼 수 있던 것이다.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에서는 1988년 이래로 매년 5월 지용제가 열린다. 올해도 오는 5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열린다. 축제를 통해 시인 정지용을 추모하고, 그의 시문학 정신을 이어가며 더욱 발전시키자는 뜻으로 매년 5월에 열리는 문화축제다. 이번 축제에는 지용백일장을 비롯한 시 낭송대회, 문학캠프와 체험행사, 전시회 등이 다채롭게 열릴 예정이다. 5월은 시인이 표현했던 것처럼 꿈에도 잊혀지지 않던 넉넉한 고향, 마음의 고향 옥천에 들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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