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개관한 ‘충북교육청 학생교육문학관’에는 북카페를 비롯하여 ‘충북 근대작가 15인’을 전시해놓은 공간이 있다. 위원회에서 선정한 15인의 선정기준은 세 가지다. 첫 째 ‘충북출신’일 것, 둘 째 ‘작고하신 분 중에서’, 마지막으로 ‘이념을 떠나 문학적 업적이 뛰어난 사람’중에 선정했다고 한다.

뜻밖에도 15인 중에는 친일파로 알려진 김기진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순수하게 문학만을 보자는 취지지만 삶과 문학을 따로 볼 수 있을까 싶다. 비약일 수도 있지만 친일파 중의 친일파인 이완용도 다른 면으로 봐야한다. 이완용은 당대의 명필가 중 하나였다. 그런 그를 매국행위 말고 서예가적 기질만 따로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특히나 올해처럼 삼일운동이 일어난 지 99주년을 맞이하는 해에는 무척 아쉽기만 하다.

충북 청원 출생의 ‘김기진’은 한국 근대비평의 기초를 개척한 비평가로 평가받는다. 시와 에세이 등을 통해 활발한 작품 활동과 비평을 했으며 신경향파 문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알려져 있다. 신경향파란 1920년 무렵에 우리나라 문단에 나타난 사회주의 문학파 중의 하나로 삼일운동 이후 병약한 문단의 분위기에 염증을 느낀 김기진·박영희 등이 주동이 되어 일어난 것으로 알려진 사회주의 경향을 말한다.

김기진은 일제강점기 말기에 활발한 친일행적을 보인다. 당시 가장 강력한 친일문예조직의 중추적 인사였다고 전해진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 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문학 부문에 김기진은 모두 들어가 있으며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에도 이름을 올렸다.

해방 이후 김기진은 6·25때 조선인민군에 점령되어 체포되어 인민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는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의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참전하여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상하는 등 대표적인 반공주의 문인으로 활동한다. 김기진은 1938년 창씨개명을 했으며 1985년 82세를 끝으로 지병으로 사망한다.

김기진의 문학은 정치를 우위에 두고 문학을 수단화하는 등 표현수단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친일 작품도, 창씨개명도, 반공주의 문학도 하나의 수단에 불과했을지 모르겠다. 그를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

과거 로마에는 ‘담나티오 메모리아이’, 라틴어로 ‘기록말살’을 뜻하는 형벌이 있었다. 이 벌은 특정한 사람이 기억되어서는 안 된다는 형벌을 뜻한다. 로마의 반역자나 로마에게 불명예를 끼친 자들을 대상으로 내린 형벌로 로마에 남겨있는 기록, 그림, 조각상에 새겨진 모든 이름이 지워져서 로마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취급 받게 되는 것이다. 어찌보면 살아있었다는 것도 후대에 전해지지 않는 가장 무서운 형벌인 셈이다.

역사란 어떻게 기록되고 어떻게 평가 받는 것일까? 아직도 교과서에 버젓이 소개되는 친일문학가들. 왜곡되고 축소된 그들의 친일행적을 보는 것이 영 불편하다.

역사가 E.H. 카(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의 문학과 역사가 올바르게 서기 위한 대화는 계속되고 있을까? 분명한 것은 삶이 예술에 선행했을 때 비로소 예술도 조명할 수 있는 것이다.

이 기 수 / 충북SNS 서포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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