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아프고 난 아침엔 어떤 감정을 꺼내야 할까. 밖으로 향한 눈을 안으로 돌려 떠 본다. 깜깜한 내 내면의 동굴에 짙게 깔린 어둠을 걷어낸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감정 주머니를 살핀다. 행복, 슬픔, 아픔, 기쁨, 서러움 등 여러 가지 감정들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뒤섞인 감정의 목록들을 정리해 본다.

요즘 자주 드는 감정은 서러움과 아픔이다.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머리맡에 있는 손거울을 집어 든다. 거울을 보고 있자니 가슴 속에 찬바람이 일렁인다. 패인 입가 주름 속에 어둠을 채우며 경련처럼 흘렀을 시간들이 떠오르자 아렸다. 미치게 아플 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아프고 난 후에 아픈 밤들을 돌이켜 보니 처량했다. 찬바람 몰아치는 절간 뒷마당에 홀로 쌓이는 풍경소리처럼.

기차에 그녀를 실어 보내고 돌아오는 길. 외로움이 고개 드는 게 싫어 영화관으로 차를 몰았다. 영화관이 바로 지척인데 갑자기 배가 꼬이기 시작하더니 빙판에 알몸으로 뒹구는 것처럼 한기가 몰려왔다. 아무래도 몸 돌아가는 품새가 수상했다. 영화를 포기하고 핸들을 돌려 다시 집으로 왔다.

보일러를 켜고 침대에 전기장판을 깐 후 온도를 최대로 올렸다. 그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배가 쿡쿡 쑤시고, 스파링을 하고 온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리고, 머리는 가마솥의 물처럼 펄펄 끓었다. 그리고 집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중국으로 출장을 갔고 아들은 불금이니 친구들과 신나게 불타고 있을 것이다. 나는 홀로 고요 속에 갇혀 아픔을 견뎌야 했다. 아픔은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줄지어 나를 찾아왔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핸드폰에 장문의 문자가 들어왔던 것이 퍼뜩 떠올랐다. 지카바이러스 위험국가에 다녀왔으니 증상이 있으면 바로 병원으로 가라는 내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문자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모기에 물린 다리를 벅벅 긁으며 온몸으로 두려움이 몰리는 것을 감지했다.

이불 속에 묻힌 손을 꺼내 스마트 폰을 집었다. 친절한 네이버에게 물을 공산이었다. 지카바이러스의 증상을 검색했다. 근육통은 있었으나 결막염 증상이 없는 것, 설사를 하는 것으로 보아 지카바이러스 감염은 아니라는 자가 진단을 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안도라는 감정에 나를 맡긴 채 아픈 배를 쥐고 끙끙 거리다 잠 속으로 침잠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잠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빠져나오지 못한 걸까. 속이 울렁거려 눈을 뜨니 환하게 켜진 전등불이 맥없이 나를 덮고 있었다. 얼른 화장실로 튀었다. 변기를 붙잡고 속에 것을 다 게워 냈다. 먹은 것도 없는데 뭐가 그리 자꾸 쏟아지는지. 겨우 몸을 일으켜 변기 위에 앉았다. 적막이 가득 내려앉은 화장실에 번들거리는 타일만이 조직적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타일 바닥을 짐승처럼 벅벅 기어 나와 마른 볏단이 되어 침대에 쓰러져 눈을 감았다. 그리고 까맣게 정신을 놓았다.

철사 줄처럼 늘어진 햇살이 눈을 간질였다. 눈꺼풀이 빈 내장에 전등을 켜 놓은 것처럼 환해졌다. 슬며시 눈꺼풀을 열고 창밖을 보니 한낮이었다. 그렇게 침대에 누운 채 한참을 창밖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다. 또 스스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으스름 저녁이었다. 일어나서 물을 한 컵 떠들고 침대로 올라와 갈증을 식혔다. 물이 들어가자 다시 위가 칼로 저미는 듯 아프더니 화장실을 불렀다. 화장실에 가서 다시 쫙쫙 게워냈다.

그렇게 이틀을 자고 깨고를 반복했다.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온 아들이 걱정이라는 감정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약을 사왔다. 나는 약을 밀어 놓고 물만 마셨다. 어떤 병이든 사흘은 아파야 낫는다는 근거 없는 믿음이 오래 전부터 내게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아픈 나에게 엄마는 안쓰러운 눈길과 따듯한 손길을 주시며 세 밤만 자면 나을 거라고 도닥거리곤 했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마법에 걸린 걸까. 그 믿음은 이미 어른이 된 내게도 풀어지지 않았다. 아플 때면 마법은 강하게 작용을 했다. 그렇게 사흘 째 되는 날부터 나는 조금씩 회복 되었다. 얼굴 살이 쭉 빠져서 한결 늙어 보였다. 아이는 한번 아프고 나면 쑥쑥 자라고 노인은 한번 아프고 나면 푹푹 늙는다고 누군가 했던 말이 훅 스친다.

문득 서러움이라는 감정을 꺼내서 가슴에 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이가 들수록 감정 주머니를 잘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본다. 오늘은 내 안에 있는 감정 주머니를 정리해 본다. 기쁨, 감사함, 사랑, 이런 긍정적인 감정은 자주 꺼낼 수 있게 맨 위쪽에 자리하도록 배열 한다. 슬픔, 서러움, 노여움은 저 아래 쪽 후미진 곳에 접어 둔다. 아주 가끔만 꺼낼 수 있도록.

혼자 아팠던 밤의 서러웠던 감정을 훌훌 털고, 혼자서 아픔을 굳세게 이겨낸 후 찾아오는 평온함이라는 감정을 꺼내 가슴에 달아 본다.

김 희 숙 / 수필가, 원봉초등학교병설유치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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