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을 여니 며칠 전부터 기다려온 동백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꽤 추운 베란다에서 긴 겨울을 견디고 꽃봉오리를 맺고 있더니 드디어 살포시 얼굴을 내민 것이다.

주인이 잠든 사이 먼 하늘 달님의 응원을 받았는지 빠알간 얼굴이 차마 바라보기가 아까워 꽃 곁에서 맴돈다. 벌써 10여 년 전 남녘에 여행을 하다가 남편이 동백을 발견하고 빨강 분홍 백동백 세 그루를 사와 겨울이면 더욱 친해지는 가족이다. 백동백은 3월초가 넘어야 피어나니 늘 빨강 동백이 제일 먼저 첫사랑 연인처럼 가슴을 달군다.

동백꽃하면 베르디의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다시 떠오르게 한다.
2014년 그러니까 학교장으로 승진한 기념으로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 공연을 보게 되었다. 교사시절부터 동백꽃을 특별히 좋아했는데 아마도 다른 꽃들이 잠잠한 겨울에 마치 땅위의 다이아몬드처럼 피어나서인지 동백꽃 사랑을 멈출 길 없다. 뒤마피스의 소설이 ‘동백꽃 여인’으로 무대에 올랐을 때 그 연극을 우연히 볼 수 있었던 작곡가 베르디는 행운이었을까? 신이 마련해 놓은 기회의 선물이었을까?

베르디에게는 그 당시 가족과 사별한 젊은 날의 슬픔을 안고 방황하고 있던 차에 연극 ‘동백꽃 여인’의 사랑과 이별, 고혹적인 젊은 여인의 갑작스런 죽음은 강한 울림과 연민으로 오페라를 작곡하는 계기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오페라가 지금까지 베르디의 수많은 가극 중에서 3대 걸작의 하나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동백 아가씨'라는 제목으로 공연된 최초의 오페라이고 보면 굴곡이 연속되는 삶의 여울에 생의 명암을 천착해낸 심도 높은 오페라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기억은 남녀 주인공의 이중창 ‘축배의 노래’에서 여주인공이 가슴에 하얀 동백꽃을 꽂은 채 열창하는 장면이다. 더없이 아름다우면서도 생의 환희와 동시에 우수가 깃든 장면이었다. 이 오페라의 근간이 된 뒤마피스의 소설 실제모델인 ‘마리 듀프레시’는 25일간은 하얀 동백꽃을 5일간은 붉은 동백꽃을 가슴에 달고 극장이나 파티에 자주 나타나 다녔다니 불우한 자신의 환경을 잊고 한번 뿐인 삶을 고결한 동백꽃처럼 살아내고 싶었던 것일까?

그토록 젊은 20대에 심한 각혈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아 그녀는 몽마르트르 묘지에 잠들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선 동백꽃을 달고 다니는 사람은 볼 수 없는데 아마도 툭 떨어져 내리는 아픔을 아무데서나 감당할 수 없음인가? 나는 벨벳으로 만든 동백꽃 코르사주를 겨울엔 머플러를 여밀 때 달고 가끔 쓸쓸해지면 향내를 맡아보기도 한다.

지난 2월초에는 성당미사를 마치고 동백꽃을 보고 싶은 마음을 누를 길 없어 서둘러 선운사로 향한 적이 있다. 갓김치로 싼 김밥과 아침에 찐 고구마로 간이 점심을 때우고 힘닿는 대로 달렸다. 가는 길에 변산반도와 모항이 자리한 해변 모래사장까지 거닐다보니 어스름해서야 선운사 입구에 도착하였다.

과연 동백꽃이 피어 있을까? 시간이 너무 늦어 선운사 경내로 들어갈 수 나 있을까? 조바심 나지만 꽤 긴 진입로를 걸어 당도하니 너무 늦어 입장을 허락할 수 없단다. 청주에서 달려왔는데 동백꽃 보려고 달려 왔는데......

“아직 꽃 안폈습니다. 선운사 동백꽃은 춘백이라 더 있다 보실 수 있습니다.”
그대로 발길을 돌려 걸어나오는데 나는 한 점 아쉬움이 없었다. 동행한 남편도 괜한 헛걸음이라며 불평한마디 들추지 않았다. 우리가 잠자는 사이 꽃이 피어나듯이 인생이란 갑자기 예상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기에 한편의 연극을 매일 여는 것이다.

동백꽃을 보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후두둑 지는 꽃 말이예요
나를 두고 가시려는 님아
선운사 동백꽃 숲으로 와요
떨어지는 꽃송이가
내 맘처럼 하도 슬퍼서
당신은 그만
당신은 그만
못 떠나실 거예요
선운사에 가신 적이 있나요
눈물처럼 동백꽃 지는 그곳 말이예요

돌아오는 차안에서 어느 가수가 부른 ‘선운사’ 노래를 거듭 들으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에 잠들어 있는 동백꽃 여인 ‘마리 듀프레시’를 생각했다. 떨어져 또 한 번 피는 동백꽃처럼 우리 생도 그럴 수만 있다면......무심한 동백꽃에 밤낮 사무치는 2월이다. 내 깊은 처음 눈물 한 송이 동백으로 어디선가 피어나겠지.

박 종 순 / 복대초 교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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